소지품은 잘 챙기시구요
살다 보면 유난히 지치는 날이 있다. 특별히 의기소침해질 만한 일이 있었더라면 그 핑계로 누구 하나 꾀어내어 술이라도 마시거나 노래방에서 소리라도 꽥꽥 지를 텐데. 아무 일도 없었음에도 지치는 날. 아무 일이 없어서 지치는 날.
퇴근길 열차 차창 밖으로 해 질 녘의 한강을 바라보았다. 주홍빛 윤슬이 너무도 예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서 공연히 더 서럽고 공허해지는 마음. 노을이 넘어가는 어느 언저리쯤에 갈 곳 없는 시선을 던져두고 멍하니 있는데, 스피커에서 수줍지만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다고, 댁에 돌아가셔서 편안하게 하루를 마무리하시라고, 안전히 운행해서 가시는 길까지 잘 모셔다 드리겠다고.
참 이상한 일이었다. 미사여구가 화려한 감동적인 말도, 인생의 깨달음을 주는 명문장도 아니고 오늘 하루 고생했다는 평범한 말 한마디에서 위로를 받다니. 그 평범한 말도 특별해질 정도로 각박한 내 삶이었다니. 그리고 쑥스러움을 이겨내고, 오로지 선의로,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위로를 전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날 내가 탄 열차는 서울 지하철 7호선. 이 책의 저자는 5호선을 운전하며 승객들에게 응원을 건네는 기관사이다. 무엇을 계기로 지하철의 기관사가 되기로 결심했는지, 어떤 이유로 차 내 방송을 하려고 마음먹었는지, 매일 방송을 준비하는 마음은 어떤지 소박하지만 진솔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같은 지하철이지만 7호선은 한강을 건너는 등 얼마간 지상 구간이 있는 반면에 5호선은 전 구간이 도시 아래 땅 속을 달리고, 심지어 두 번이나 땅 속에서 한강을 건넌다. 그러니까 저자는 한강보다 깊은 땅 속 터널의 어둠을 주시하면서 이름 모를 승객들의 밝아오는 하루를 응원하고 지친 퇴근길을 위로하는 것이다.
나는 꽤 오랫동안 5호선 군자역과 광화문역 사이를 매일 출퇴근했는데, 책을 읽으며 가만히 생각해보니 광화문 역에서 이런 멘트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번 역은 특별히 직장인 분들이 많이 하차하실 예정입니다.
제가 내리실 시간을 충분히 드리겠사오니,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밀지 마시고
안전하게 천천히 하차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행운과 즐거움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47쪽)
이런 방송을 들으면 적어도 이 열차를 내리는 동안에는 안전하겠구나, 안심이 된다. 비록 찰나의 시간에 불과하겠지만 얼굴도 모르는 목소리로부터 얻는 안심이라니, 이 얼마나 행운이며 사치인가.
서울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이런 '감성 방송'을 들은 일이 있을 것이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며칠 연달아 방송을 듣게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기운이 넘치는 날도 있기 마련인데, 그럴 때는 '아이참, 저 오늘은 괜찮은데?' 하고 마음속으로 대꾸하기도 한다. 다른 어떤 날은 이어폰을 꽂고 신나게 음악을 듣거나 유튜브 화면에 정신이 팔려서 방송이 나왔는지 어땠는지 모르는 날도 있었겠지. 하지만 내가 내린 후에도 쉼 없이 도시를 오가며 승객을 내려주고 태워가는 지하철이 있듯이, 내가 듣지 않더라도 응원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꾸준히 말을 건네는 기관사가 있다. 어쩌면 그런 우직함이야말로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힘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방송이 흘러나온 뒤 열차 객실의 분위기는 어떨까. 마치 공익 드라마처럼 사람들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른다든지 미묘하게 따스한 공기가 감돈다든지 하면 참 좋을 텐데, 다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던 대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다. 간혹 일행이 있는 사람들이나 "이런 방송을 다 하네" 하고 알은척하는 정도. 아, 역시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 걸까. 그러나 좌절하기는 이르다. 이 책에 따르면 그렇게 방송을 하고 나면 누군가는 운전실로 다가와 음료를 건네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고객센터에 고맙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고 한다. 모두들 무표정한 얼굴로 차가운 열차에 힘없이 실려가는 듯 보이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서로 마음을 나누고 있었다.
이 책을 기관사라는 직업에 대한 초보자용 가이드북이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비슷한 예를 들자면 문화방송에서 방영한 적 있는 ‘아무튼 출근’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떠올리면 된다. 직장에 다니는 일반인이 방송국에서 제공한 카메라를 들고 자신의 일과를 촬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약간 과장되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이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그 직업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이 책도 ‘지하철 기관사’라는 직업을 가까이에서 살펴볼 기회를 제공한다. 예컨대 지하철을 탄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궁금했던 질문들을 해소할 수 있다.
‘나는 지하철 타고 출근하면 되는데 기관사는 뭘 타고 출근할까?’
‘지하철 운전은 자동일까?’
‘지하철 운전이 어려울까, 자동차 운전이 어려울까?’
‘지하철 운전하는 동안 깜깜한 터널만 보는 걸까?’
‘어둠 속만 보고 있으면 갑자기 뭔가 튀어나올까 봐 무섭진 않을까?’
‘왜 차고지가 아니라 중간 역에서 교대할까?’
‘몇 시간 동안이나 운전을 하는 걸까?’
이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 직업을 미래의 업으로 삼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정보도 담고 있다. 이를테면 '철도차량 운전면허 시험'에 대한 설명이 실려있다. '지하철을 운전하기 위해서는 운전면허가 있어야 하는구나!' 하는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기회도 생길지 모른다. 열차를 운전하는 것보다는 타는 것에 관심이 더 많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사소하지만 신기한 아래와 같은 정보에 더 감탄하게 되겠지만!
‘사람이 우르르 내리는 역에서는 지하철 차체가 ‘꿀렁’한다니!’
‘운전실 안에 간이 변기가 있다니!’
‘매년 기관사들이 참여하는 방송왕 선발 대회가 있다니!’
저자는 어쩐지 귀여운 이 방송왕 선발대회에서 2020년 최우수상(1등)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다양한 방송에 출연하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투박하지만 다정한 문체는, 붐비지 않는 오후에 우연히 탄 지하철에서 듣는 기관사님의 나긋한 응원 방송처럼 편안하게 들린다. 마치 잔뜩 멋 부린 문장만이 위로를 건넬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듯.
다시 내일이 찾아오고, 바쁘고 고된 하루가 시작되겠지만
저는 여러분들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승객 여러분들을 안전하게 모실 수 있도록
늘 최선을 다하고 있겠습니다.
안전하게 천천히 하차하시기 바라며,
열차 출입문 닫겠습니다.
가시는 목적지까지 안녕히 가십시오. (176쪽)
(서평단 모집 글을 보고 신청했고, {북센스} 출판사에서 흔쾌히 책을 보내주셔서 부지런히 읽고 쓴 서평입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29000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