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집의 서평을 쓰는 방법
서평집의 서평은 어떻게 쓰면 좋을까?
‘서평은 어떻게 쓰는 걸까’를 고민하다 모범이 되는 예시를 찾게 되고, 그러다 보니 또 서평집을 읽어 두 번째로 서평집의 서평을 쓴다.
사실은, 그레이엄 핸콕의 《신의 지문》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책 두 권(상, 하권)의 지면을 몽땅 《신의 지문》의 허구성을 논증하는 내용으로 채운 서평, 영국의 고대사 전문가 피터 제임스가 쓴 《옛 문명의 풀리지 않는 의문들》을 다시 읽어볼까 하는 중이었다. 능숙한 솜씨로 유려하고 똑 부러지게 조목조목 따지는 글을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디에선가 이 책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의 서문을 읽었다.
나로서는 안 될 것 같을 때마다 책을 읽는다. 엄청 자주 읽는다는 얘기다. 그러고 나면 나는 미세하게 새로워진다. 긴 산책을 갔다가 돌아왔을 때처럼. 현미경에 처음 눈을 댔을 때처럼. 낯선 나라의 결혼식을 구경했을 때처럼. 어제의 철새와 오늘의 철새가 어떻게 다르게 울며 지나갔는지 알아차릴 때처럼. 커다란 창피를 당했을 때처럼.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처럼.
이 서문은 새침하게 새치기해 들어왔고, 영국 신사는 기꺼이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논증을 갈구하던 자리를 새치기한 부작용이 없지는 않았다. 두 번째로 실린 서평 <사랑할 힘과 살아갈 힘-사노 요코의 『100만 번 산 고양이』와 『태어난 아이』를 읽고>의 문장 “우선, 백만 년이나 죽지 않은 고양이가 있었어. 백만 번이나 죽고 백만 번이나 살았던 거야.”를 읽고는 ‘집고양이 평균 수명이 15년이니까 백만 년을 산 고양이가 죽고 산 횟수는 대략 육만 칠천 번 아닌가. 평균 수명이 5년인 길고양이라 치더라도 이십만 번이 아닌가” 따위의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번째 서평 <미래의 정의-백상현의『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를 읽고>는 짙은 감성과 여운으로 나를 이끌었다. 이쯤부터는 고양이가 다시 태어난 횟수가 백만 번이든 이십만 번이든 상관없게 되었다.
마치 한 꾸러미 안에 든 빨강, 노랑, 초록의 곰 젤리들처럼 이 책에 실린 서평들은 저마다의 향과 맛을 자랑한다. 예를 들면, 첫 번째 서평은 책의 제목과 같은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로, 유진목의 시집 《식물원》을 읽고 쓴 것이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마야.
연인(아마도 애칭이 '하마')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서평인 것이다.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도 있다. 《전태일 평전》을 읽고 쓴 서평에서는 그 시절 평화시장에서 일했던 친구의 어머니를 인터뷰하기도 했고, 나카노 노부코의 《바람난 유전자》의 서평은 헬스 트레이너 ‘구’와 그 수강생 ‘신’의 대화문이다.
서평집의 서평도 있다. 금정연의 서평집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의 서평이다. 이슬아 작가는 서평집의 서평을 금정연의 책에서 금정연이 했던 방식으로 직접 책 설명을 회피하며 썼다. 나도 그 바통을 이어 이렇게 써볼까 한다.
그거야 이 책을 읽으면 자연스레 알게 될 일이다. 이슬아도 아닌 내가 구태여 설명할 필요는 없단 말이다. 그러니 나는 이렇게 말해야겠다. 내 브런치를 읽고 있을 정도로 글이라는 것에 관심이 있는 당신이라면 이런 텍스트 따윈 던져버리고 당장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를 읽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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