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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서평집의 서평을 쓰는 방법

이슬아,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헤엄출판사, 2019


서평집의 서평은 어떻게 쓰면 좋을까? 


‘서평은 어떻게 쓰는 걸까’를 고민하다 모범이 되는 예시를 찾게 되고, 그러다 보니 또 서평집을 읽어 두 번째로 서평집의 서평을 쓴다.

 

사실은, 그레이엄 핸콕의 《신의 지문》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책 두 권(상, 하권)의 지면을 몽땅 《신의 지문》의 허구성을 논증하는 내용으로 채운 서평, 영국의 고대사 전문가 피터 제임스가 쓴 《옛 문명의 풀리지 않는 의문들》을 다시 읽어볼까 하는 중이었다. 능숙한 솜씨로 유려하고 똑 부러지게 조목조목 따지는 글을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디에선가 이 책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의 서문을 읽었다. 


나로서는 안 될 것 같을 때마다 책을 읽는다. 엄청 자주 읽는다는 얘기다. 그러고 나면 나는 미세하게 새로워진다. 긴 산책을 갔다가 돌아왔을 때처럼. 현미경에 처음 눈을 댔을 때처럼. 낯선 나라의 결혼식을 구경했을 때처럼. 어제의 철새와 오늘의 철새가 어떻게 다르게 울며 지나갔는지 알아차릴 때처럼. 커다란 창피를 당했을 때처럼.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처럼.


이 서문은 새침하게 새치기해 들어왔고, 영국 신사는 기꺼이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논증을 갈구하던 자리를 새치기한 부작용이 없지는 않았다. 두 번째로 실린 서평 <사랑할 힘과 살아갈 힘-사노 요코의 『100만 번 산 고양이』와 『태어난 아이』를 읽고>의 문장 “우선, 백만 년이나 죽지 않은 고양이가 있었어. 백만 번이나 죽고 백만 번이나 살았던 거야.”를 읽고는 ‘집고양이 평균 수명이 15년이니까 백만 년을 산 고양이가 죽고 산 횟수는 대략 육만 칠천 번 아닌가. 평균 수명이 5년인 길고양이라 치더라도 이십만 번이 아닌가” 따위의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번째 서평 <미래의 정의-백상현의『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를 읽고>는 짙은 감성과 여운으로 나를 이끌었다. 이쯤부터는 고양이가 다시 태어난 횟수가 백만 번이든 이십만 번이든 상관없게 되었다. 


마치 한 꾸러미 안에 든 빨강, 노랑, 초록의 곰 젤리들처럼 이 책에 실린 서평들은 저마다의 향과 맛을 자랑한다. 예를 들면, 첫 번째 서평은 책의 제목과 같은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로, 유진목의 시집 《식물원》을 읽고 쓴 것이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마야.


연인(아마도 애칭이 '하마')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서평인 것이다.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도 있다. 《전태일 평전》을 읽고 쓴 서평에서는 그 시절 평화시장에서 일했던 친구의 어머니를 인터뷰하기도 했고, 나카노 노부코의 《바람난 유전자》의 서평은 헬스 트레이너 ‘구’와 그 수강생 ‘신’의 대화문이다. 


서평집의 서평도 있다. 금정연의 서평집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의 서평이다. 이슬아 작가는 서평집의 서평을 금정연의 책에서 금정연이 했던 방식으로 직접 책 설명을 회피하며 썼다. 나도 그 바통을 이어 이렇게 써볼까 한다. 


그거야 이 책을 읽으면 자연스레 알게 될 일이다. 이슬아도 아닌 내가 구태여 설명할 필요는 없단 말이다. 그러니 나는 이렇게 말해야겠다. 내 브런치를 읽고 있을 정도로 글이라는 것에 관심이 있는 당신이라면 이런 텍스트 따윈 던져버리고 당장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를 읽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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