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가 나보다 잘하는 게임?
처음 이 책에 끌렸던 것은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우리 엄마가 나보다 잘하는 게임? 그러고 나서 책 표지를 봤는데 옛날 게임의 전형 같은 2D 평면 배경에 픽셀 그래픽이 둥둥 떠 있었다. 그래, 이 책이구나!
도서관에 간 김에 찾아보았다. 2021년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들을 단행본으로 묶은 책에는 실려 있었지만 예의 표지로 된 책은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내용은 같겠지만 아무래도 그 책을 읽고 싶어, 다른 책만 손에 들고 나왔다. 이게 지난 3월의 일이다.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의 지은이가 박서련 소설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두어 달이 지난 후, 그러니까 며칠 전 러닝을 하면서였다. 러닝 할 때(만) 즐겨 듣는 팟캐스트 “책읽아웃”에 박서련 소설가가 출연한 것이다. 소설 《마법소녀 은퇴합니다》를 들고.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어쩜 이 소설은 제목부터 이렇게 사람을 끄는 재주ㄱ... 하는데 익숙한 그 제목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이 들렸다. 이쯤 되면 누구라도 느낄 것이다. 바로 지금이 이 책을 읽을 때라고.
이 책은 일곱 편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소설집이다. 표제작인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을 필두로 <미키마우스 클럽>, <보>, <곤륜을 지나>, <기미>, <그 소설>, <A Queen Sized Hole> 들이 따른다. 단편 소설집을 읽다 보면 한두 이야기쯤은 다른 이야기들의 이미지에 밀려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곤 하는데 이 소설집은 모든 이야기가 강렬하게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데뷔 시기가 지나치게 일러진 요즈음, 아직 서로의 아름다움에 면역되지 않은 어린 스타들이 뒷일을 상상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몸을 섞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미키마우스 클럽> (77쪽)
어릴 때 쓴 쪽글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끼기에는 나이를 제법 먹었다. 어쩐지 애틋하고 그리운 마음과, 여기서부터 한 치도 나아가지 못했구나 하는 너그러운 포기 같은 것이 일어났다. <보> (85쪽)
이처럼 소설의 문장들은 우리가 매일 쓰는 평범하고 쉬운 말로 쓰였지만 그 말들은 낯설게 짝을 이루거나 흔히 쓰이지 않던 장면에 쓰이면서 그 농도가 짙어진다. 이렇게 농밀한 문장들이 모여서 이루어졌기에,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묵직하게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말투는 감각적이되 담담하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만 갖고 있는 이미지인데, 공기는 차갑지만 햇볕만큼은 따스한 한겨울 낮, 짙은 눈 화장을 하고 담배를 문 채 낮은 목소리로 털어놓는 친구의 고백을 듣는 기분. 그래. 이건 어디까지나 나만 갖고 있는 이미지니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도, 이야기가 관심을 갖는 사람도 모두 여성이다. 그나마 등장하는 남성은, 자기 좋을 대로 성경의 논리를 끌어들이다가 또 여차하면 속세 논리도 끌어들이는 등 오락가락 한심한 목사 남편(보)이거나 시어머니 때문에 곤혹스러워하는 아내에게 “우리 엄마 원래 그래.”라는 말 밖에 할 줄 모르는 무책임한 남편(곤륜을 지나), 치매 걸린 엄마를 보살피는 고충을 이야기하자 엄마를 죽이는 자연스러운 방법 따위나 고민하는 비상식적인 남자(기미) 등이다. 그중에서, 맨날 돈 꿔 달라는 승희에게 역정을 내면서도 부르면 냉큼 달려오는 남사친 유민이 등장하는 <A Queen Sized Hole>이 나는 참 좋았다. 구질구질하게 얽혀있는 게 지긋지긋하지만 그래도 서로를 의지하는 이야기들에 나는 애착이 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역시 표제작인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당신’으로 지칭되는 ‘나’이다. 나는 아들 지승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고, 할 수 없는 것도 웬만하면 해보려고 하는 엄마이다. 하다못해 게임 과외까지. 게임 못한다고 놀림받고 돌아온 아들에게 게임을 알려주기 위해 나는 게임 과외를 받는다. 결국 아들보다 그 게임을 잘하게 된 엄마는 지승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하나 더 생겼지만, 결국 그런 엄마에게 돌아오는 것은...
이야기들은 상처를 보듬지 않는다. 아물지 않은 생채기를 드러낼 뿐이다. 읽는 이들은 안다. 허술하게 감아둔 붕대는 답답하기만 할 뿐 상처를 낫게 하지 않는다. 서늘한 공기 중에 드러난 상처라서, 오히려 그 상태를 직시할 수 있다. 이야기들은 유난히도 시원하게 붕대를 끌러내고 짓무른 상처에 상쾌한 공기를 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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