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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녀 힙합》

그의 손에 쥐어지는 합격목걸이

이진송 지음, 《차녀 힙합》, 문학동네, 2022


나는 장녀인가 차녀인가.


이 책 제목을 본 엄마가 너는 장녀가 아니냐고 물었다. 우리 집은 1남1녀 집안이고 나는 1녀이자 여동생이자 막내의 역할을 맡고 있다. “1남1녀 중 장녀라고 하면 듣는 사람은 내가 누나고 남동생이 있는 거로 오해할 테니 나는 차녀가 아닐까?” 하니 엄마도 “아, 그런가.” 하신다. 이 책에서도 오빠를 둔 여동생도 끼워주기 때문에 차녀겠거니 한다. 하지만 엄마가 고개를 갸웃한 것도 그럴법한 게 우리 남매 둘로 보면 차녀지만 장남인 아빠와 장녀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같은 항렬에서 제일 빨리 태어난 여자아이 즉, 장녀였다.


실제로 나의 신상 정보를 잘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오빠가 있는 막내라는 말을 하면 “어머, 장녀인 줄 알았는데?”라고 놀라는 사람이 열에 아홉이다. 같은 항렬에서 제일 빨리 태어난 여자아이라는 사실이 정말로 나를 장녀롭게 보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란 아이는 막내이자 차녀이자 장녀인 그런 엄청난 아이다.


이 아이러니한 지위 중에서도 그래도 나는 차녀가 내 정체성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 《차녀 힙합》의 내용을 바탕으로 내가 차녀라는 증거를 대 보이겠다.


증거 #1.

나 역시 돌사진이 없다. “내 사진은?” 묻자 엄마는 “글쎄, 안 찍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없는데…’ 하며 언뜻 미안한 기색이 나타났다 사라진 걸 보면서 아, 어쩌면 안 찍었겠구나, 생각한 적이 있다.


증거 #2.

어릴 때 블럭을 쌓고 노는 나를 보고 할머니가 “아이고 잘하네. 니가 아들로 태어났으면 건축가도 되고 할낀데.” 하셨다. 그때 할머니는 모르셨을 거다. 딸인 내가 건설회사에 다니면서 그 비슷한 일을 하게 될 거라는 걸.


증거 #3.

첫 회사에 입사했을 때(오빠와 나는 마침 같은 해에 입사했다) 나는 지금껏 내 인생에서 입어본 적 없는 비싼 정장을 선물 받았다. 비싼 만큼 질도 좋아서 벌써 1N년이 지난 지금도 애지중지하며 입고 있다. 그리고 오빠는, 차를 선물로 받았다.


떨어진 비트에 내 몸을 맡기고 리듬을 좀 타 보았다.


아니 뭐 사진 한 장 없을 수도 있고, 옛날 사람인 할머니가 그런 말 할 수도 있고, 오빠는 교외로 출퇴근하니 어쩔 수 없었겠지. 유치하게. 유치하다고? 이 책의 콘셉트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차녀의 렌즈로 세상을 보는 차녀 힙합. 모든 인과관계를 차녀라서로 몰아가는 극악무도한 프로파간다!(228쪽)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천성이 관심을 싫어해 모든 상황에서 ‘제발 나는 그냥 지나쳐라, 관심은 사양합니다’ 하는 사람이므로 차녀가 잘 맞는 것도 같다. 무디기도 무뎌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살았던 덕분에 단 한 번도 내 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지만 그때는(조금 아쉬웠지만) 그냥 그런 갑다 했다.


한때 나는 이제 와 생각해보니 좀 서운했다 싶은 일이 떠오르면 말을 꺼냈다. “그때 나 방 갖고 싶었어.” 하면서. 하지만 이제 와서 내 방을 내놓으라거나 정신적인 피해보상을 요구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냥 그랬다, 그런 사실이 어린아이에게 있었다고 단순히 공유하려는 것이었다. 새삼스럽게 어릴 때 못 가졌던 방에 대해 덤덤히 말하는 내게 엄마는 무척 미안해하셨다. 말하면서 나는 조금씩 가벼워지는데 엄마는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그런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한때 내가 사소한 일들로 상처받았던 것처럼 지금 나의 사소한 말로 엄마가 상처받는 게 싫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잘 알고 있다. 내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라 그때는 부족한 형편에 현실적으로 해줄 수 없는 일이 많았고, 누군가는 희생하고 불편해져야 하는 상황에서 어리고 약한 쪽이 그것을 감당하는 일이 당연했던 사회였다는 사실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도.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해보면 우리 남매는 조금씩 나누어 가졌다. 오빠는 나와 달리 아주 어릴 때부터 자기 방이 있었지만, 엄마는 내 유치원 시절 같은 반 엄마들과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는 덕분에 “내 이름 엄마”로 더 자주 불린다. 나는 오랫동안 타향살이를 하는 동안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고 안쓰러운 딸내미였지만, 내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주말마다 일로 바쁜 새언니에게 바통을 이어받아 조카를 돌보는 오빠가 지금은 더 엄마의 관심 대상이다.


지금 내가 쓴 것처럼 글쓴이도 장녀로 태어나 고달팠을 자신의 언니와, 둘째는 아들이길 바랄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와, 돌이켜보면 차녀에게도 부족함 없는 사랑을 나눠 준 부모를 이해하고 어루만진다. 결국 또 차녀니까, 가족들이 나에게 서운하게 해 줬어도 다 가슴속에 묻을 수밖에......라고?


아니다. 이 책은 그런 걸 하려는 게 아니다. 너무 뻔한 서사이지 않나.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다. 글쓴이는 말한다. 애초에 가족의 중재와 화합에 열을 올리느라 자신의 감정이 뭔지도 모르는 이 죽일 놈의 ‘차녀병’을 벗어던지자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한정된 자원을 가졌던 부모와 과거를 원망하는 것도 계면쩍은 일이다. 선택지가 별로 없었던 만큼, 둘째는 다양한 선택지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무럭무럭 자라난 나에게는 가급적 더 많은 기회를 주자. 타인의 평가와 말에 휩쓸려 섣불리 선택지를 지우지 말고, 해봐서 별로인 것도 해보니 생각보다 괜찮은 것도 모두 만끽해봤으면 좋겠다. (106쪽)


태생적으로 양보하고 이해하는 것이 몸에 밴 자신의 차녀스러움을 이해하되 그 태도에 억울한 적이 있었다면 이제는 그렇게 살지 말자고. ‘나는 차녀라서 그래. 에휴, 불쌍한 나 자신. 불행한 어린 나’는, 이제 보내주자.


그러기 위해 글쓴이는 멍석에 제대로 올라선다. 눈치 보지도 않고 가진 그대로를   없이 쏟아내며 폭주한다. , 아직 비트  나왔는데요처음에는 보는 사람이 오히려 머쓱하다가 결국 헤에 하며  벌리고 보게 되는  짜인 무반주 공연이다. 이렇게 “한바탕 수다를 떨고 나면, 이내 상쾌하게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날  다는 것을 믿는다(158). 이게 바로 “우리가 서로의 구멍에 조금씩 흙을 부어주는 시간(158)” 되리라는 사실도.


그동안 남모를 설움을 쌓아왔을 이 세상 모든 차녀는 물론, 자기만 힘든 줄 알았던 k-장녀 장남들, 수 없는 만행에도 귀여우니 용서받았던 막내들, 그리고 끊임없이 그들을 사랑하고 그래서 또 상처를 안겼던 부모님들까지 이 공연을 봤으면.


그리고 그의 손에 쥐어지는 합격 목걸이! 뿌이뿌이뿌이뿌이


(서평단 모집 글을 보고 신청했고,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흔쾌히 책을 보내주셔서 부지런히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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