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많은 시간을 주진 못해

빠르게 공부하자

by 혀나

15층은 5층에 비해 제법 활기도 있고 조금은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아주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기업 계열사긴 해도 나름 IT회사라 그런지 복장도 편하게 입는 편이고 직원들 간의 관계도 조금은 수평적인 분위기였다. 물론 다른 계열사에 비해 그렇다는 거지 정말로 자유롭다는 스타트업 같은 곳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아무튼 처음 출근하는 곳이긴 했지만 나름 사회생활 경력은 짧지 않았기에 그다지 긴장되거나 하진 않았고, 또한 회사 인수합병될 때 SAP구축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안면을 익힌 사람들도 여럿 있어서 조금은 마음이 편했다.

특히 옆자리에 앉게 된 직원은 그해 공채신입으로 들어온 K사원 이었는데 너무 밝고 착하고 성격도 좋아서 인수합병으로 오게 된 나는 딱히 선배라고 하기도 뭐 한 입장인데도 너무나 친절하고 깍듯하게 대해줬다.

아무튼 짐을 싸들고 와서 정리하고 어색하게 자리에 앉아있으니 드디어 팀장님의 호출이 있었다.

그때 당시 팀장님은 S전자 출신의 젊고 솔직하고 스마트한 분이셨다. 사실 그때의 나는 팀원으로 받기에 그다지 메리트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이는 있는데 신입처럼 가르쳐야 하는 중고신입이라니.

그래서 팀장님의 호출을 받고 나는 긴장된 마음을 안고 자리로 갔다.

여러 가지 얘기를 했지만 핵심은 넌 SCM이 좋으냐 FCM이 좋으냐라는 질문이었다. (SCM은 영업, 생산, 구매 등의 물류 쪽을 얘기하고 FCM은 재무, 회계, 원가 쪽을 얘기한다.) 나는 그래서 SCM이 잘 맞는 거 같다고 대답했다. (이 대답으로 차후에 고생길이 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네가 원하는 걸 꼭 하게 해 준다는 건 아니라고 하시며 한마디 덧붙이셨다. 너는 지금까지 경험이 있으니 너에게 많은 시간을 줄 수는 없다. 최대한 빠르게 실력을 높여서 니몫을 해야 한다.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회사는 학교가 아니니 하루빨리 내 몫을 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때부터 학교 때보다 살아오면서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배우고 스스로 찾아보고 공부했던 시간이 시작되었다.

먼저 그때 당시 퇴사가 예정되어 있던 대리님의 인수인계를 사원,주임급 4명이서 같이 받았다. 물론 나도 그사이에 껴서 누구보다 열심히 인수인계 해주시는 걸 받아 적었다. 그때는 이해하면서 했던 건 아니고 일단 다 받아 적어놓으면 나중에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분이 PP모듈(생산)을 담당했는데 그걸 내가 받게 되었기 때문에 더욱이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팀에서 프로그램을 잘 짜던 Y사원에게 ABAP(SAP 프로그래밍 언어)의 기초적인 교육도 받았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알아야 하는 것의 정말 작은 부분에 불과했고 날마다 팀서버에서 교육자료를 찾아보고 이전에 진행된 프로젝트 자료들도 들여다보고 프로그램도 하나하나 뜯어보고 시스템도 직접 들어가면서 방대한 SAP시스템을 알아가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몇 달간 맨땅에 헤딩하듯이 공부하고 소소하게 프로그램한 줄 고쳐보고 세팅하나 바꿔보면서 시스템을 익혀나갔다. 그래도 그 시간 동안 물어보면 선생님처럼 잘 가르쳐주셨던 파트장님과 같은 모듈의 싹싹하고 똑똑한 Y사원이 있었기에 빠르게 시스템을 배워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혼자 쓰러져가는 시스템을 돌리던 때보다 훨씬 재미도 있었고 거기다 알면 알수록 SAP는 엄청난 시스템이라는 생각에 더 잘 알고 싶어졌다.

아무튼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흥미 있는 시스템을 배우며 조금씩 IT본부에 익숙해져 갈 때쯤 빌런이 등장한다. 정말 회사생활을 통틀어 가장 이상했고 지긋지긋했던 빌런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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