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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스스탄 여행-코로나봉 무인산장

이곳이 천국이네

by 날아라풀

2025-09-02

멍한 두통은 산에 있는 동안 계속될 모양이다.

하루도 안 빼고 아침이 되면 진통제를 찾는다.

나만 보느라 다른 대원들을 살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매번 다른 사람들이 차려주는 밥만 먹은 건 아닌지 미안하다.


고산에다 제대로 먹지 못하는 탓에 컨디션 회복이 더딘 진희가 코피를 쏟는다.

건조한 날씨에 더욱 약해진 기관지가 염려스럽다.

가져온 약을 챙겨줘야지 하면서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서 많이 미안했다.

원정대장님인 진석 형님이 진희에게 몸 상태가 나아지지 않을 것 같으면 하산을 생각해 보라고 한다.

그저 몸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온 마음들.


우치텔봉까지 가기로 한 대원들은 라첵산장에서 하루 더 고소적응을 하기로 한다.

코로나봉팀은 무인산장이 있는 전진캠프까지 가는 일정.

전날 무인산장까지 다녀온 대원들이 의자며 침상.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다 있다고 했으니 짐이 조금은 덜 수 있어 다행이다.


침낭을 배낭에 넣는데 잘 들어가지를 않는다.

숨도 차고 힘이 드니 짜증이 확 올라온다.

홀로 열여덟, 18을 하고 있으니 춘선 언니가 도와줄까 한마디 건넨다.

아니라고는 했지만 말만 들어도 힘이 되었다.

고마운 마음에 아끼는 간식을 건네주고 다시 정신을 차려 짐을 쌌다.

서두른다고 했는데 출발이 얼마 남지 않았다.

출발 준비를 하는 내게 현숙언니는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한다.

수진이는 같이 우치텔봉으로 가자고.

다들 나만큼이나 염려가 되리라.

갈 수 있는데 까지는 가보고 오겠다고 말은 했는데 여러모로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되지도 않을 욕심을 부리는 건가 두려운 마음이 컸다.

흰 산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폐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며...

차려주신 아침밥을 대충 욱여넣고 코로나봉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한다.

출발 준비

배낭을 메고 오전 8시경 출발.

신이 우리를 도우시는지 원정 내내 파란 하늘이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오른다.

악사이 빙하 옆으로 가파른 오르막 너덜길.

먼저 간 이들의 케른을 찾아가며 오른다.

어디서 이렇게 큰 돌이 떨어져 여기에 있나 싶을 정도로 계속 너덜길이다.

계속되는 너덜지대

너덜길 오른쪽으로는 커다란 빙하가 펼쳐져 있다.

도무지 남자들의 속도를 따라가기는 어려워 늦어도 천천히 내 호흡으로 걸어본다.

곳곳에 있는 크레바스를 피해 가며 숨을 돌리고.

생각보다 훨씬 큰 규모의 빙하가 펼쳐져 있어 놀라웠다.

악사이빙하

안전지대에서 빙벽화를 갈아 신고 등산화를 바위 사이에 보관해 두고는 다시 무인 산장을 향해 출발.

막상 신장이 가까이 있을 것만 같은데 오후 1시가 다 되어서야 배낭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무시무시해 보이는 검은 설벽이 둘러쳐진 곳에 우두커니 놓여 있는 무인산장.

드디어 무인산장

딱 적절한 곳에 위치에 누군가 잘도 만들어 놓으셨다.

확 트인 빙하 위로 바람 피할 곳이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금상첨화.

누군지 몰라도 복 듬뿍 받았으면 좋겠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이곳이 바로 천국이구나.

사람들이 놓고 간 이소가스, 차, 커피, 성냥, 매트까지.

코로나봉 무인산장

가스가 있는 줄 알았으면 안 가져오는 건데 말을 하며 크게 웃는다.

도착하자마자 물을 떠 와 밥을 준비하는 찬진 형님.

머리가 띵하다면서도 솔선수범하며 매 끼니를 챙기는 형님이 존경스럽다.

희성이도 부지런히 움직이며 차를 끓이고.

고소가 없다더니 에너자이저인 영길이는 아예 내 장비를 저 위에까지 갖다 놓고 온다.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나는 어찌나 미안한지.

먹기라도 잘해야지 하면서 먹는다.

즉석 밥이 잘 먹히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먹었다.

진석 형님과 기혁 형님도 수저를 들지만 많이 먹지는 않는다.

즉석 밥은 원정 식사로는 아닌 걸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잠시 숨을 고른다.

먹어야 산다

여행은 장소만 달라졌을 뿐.

먹고 마시고 잠자는 행위는 그 어느 곳에서나 반복하는 것이다.

빙하 위에 있으면서도 먹고 쉬고 싸고 눕는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

일상이 아닌 뭔가 다름이 분명 존재하지만 기본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일 있을 코로나봉 생각한다.

각자만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어느새 저녁식사로 떡라면을 먹고는 한가로운 저녁 시간을 맞는다.

이곳 무인산장이 천국이 되도록 만들고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기부를 얼마를 할 것인가를 놓고 열띤 토론이 펼쳐진다.

한참을 옥신각신하다 기부함에 넣은 금액은 비밀에 부치는 걸로.

기부 증정식까지 촬영을 거듭해 가며 제법 진지하게 기부를 했다.

희성이는 산장 촬영을 하다가 진석 형님에게 퇴짜를 맞는다.

즐거운 휴식

카메라 리허설을 거쳐 기부금 증정식을 끝내고는 슬슬 잘 준비를 해본다.

어슴프레 사위가 저물어 가고 진석 형님의 뽕짝 음악이 악사이 빙하에 울려 퍼진다.

그와 동시에 하나같이 동시에 야유를 날리는 사람들.

아... 형님! 쫌!

다들 빵 터진다.

너희들 웃기려고 했다며 바로 다른 음악을 골랐으나 곧장 퇴짜.

결국 비교적 젊은 친구들의 잔잔한 선곡으로 하루를 마친다.

웃고 떠들며 침상에 걸터앉아 되지도 않는 셀카를 기념으로 남겨본다.

후에 희성이가 이 순간이 자꾸 생각이 났다고 말하는데 나 또한 그랬다.

오래 기억에 남을 하루가 이렇게 저문다.

무시무시한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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