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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스스탄 여행-코로나봉

모두의 도움으로 여기에 닿았다.

by 날아라풀

2025-09-03

처음 산악회에서 원정 이야기가 나오고 그 대상지를 찾아볼 때 조건은 딱 두 가지였다.

산악회 회원 누구라도 갈 수 있도록 흰 산 등반과 일반 산행 둘 다 가능할 것.

기간은 10일 이내로 짧을 것.

네팔은 예전에 비해 많이 비싸졌다는 말이 있어서 제외.

경비에 부담이 적은 곳을 찾다 보니 중앙아시아로 눈길을 돌렸다.

세계테마기행에서도 보이고 요즘 뜨고 있는 키르기스스탄.

코로나봉을 사람들이 제법 가는 모양이다.

거기에서 트레킹도 가능하고 서로 집결할 수는 곳이 있으니 딱 우리에게 알맞은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석 형님도 통했다며 땅땅땅.


작년 일본 원정이 3천 미터 언저리였으니 이번에는 고도를 높여 4천 미터대로 가는 것이 적당해 보였다.

물가가 많이 올랐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비교적 싼(?) 물가도 장소를 정하는데 한몫했다.

그렇게 우리는 원정 장소를 확정하고 야간훈련 3번, 소풍 산행 1번을 거쳐 알라아르차 국립공원에 이르렀다.


단시간에 올리는 고도는 역시나 몸에 무리가 되었다.

제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산악인도 고소에는 장사가 없다더니 팔팔한 영길이가 부러울 따름이다.

무인산장에 도착한 영길이는 홀로 명상의 시간을 갖는 것처럼 보였다.

오래 산을 마주 보며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쩐지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이 조심스러웠다.

이렇게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말없는 영길이의 모습은 야간 산행 이후 오랜만이다.


오늘은 정상에 오르기로 한 날이다.

새벽 4시 정적을 깨고 코로나봉을 향해 출발한다.

일찍 잠에서 깨어 움직이는 찬진 형님은 고산 체질이라며 진석 형님이 한마디 한다.

희성이도 마찬가지.

지치지도 않는지 바쁘게 몸을 움직인다.

더할 나위 없이 하늘은 맑고 별은 총총하다.

휴대폰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 낯선 풍경과 공기.

사방이 고요한데 사람들의 불빛을 따라 조심스레 걸음을 내딛는다.


헤드랜턴 불빛을 따르며 오르는데 건너편 우치텔봉을 오르는 대원들의 불빛이 산너머로 보인단다.

뭔가 벅찬 기분이다.

바위를 사이에 두고 산악회 회원들이 곁에 있다.

저 편에 퍼지는 불빛만큼 뭔가 든든하다.

각자의 걸음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원하며 두 발을 꽝꽝 디뎌본다.

크레바스릉 피해 여기저기 지그재그로 길을 찾는 태옥 씨.

등반대장 선등-희성 순서로 위를 향해 오른다.

간밤 잠을 설쳐서 피곤할 텐데 다들 괜찮은 기색이다.

분홍빛으로 날이 밝아오고 어서 해가 나오기를 기다려본다.

그늘이라 잠시 서 있으면 한기가 몰려온다.

그래도 바람이 없으니 날씨 요정님 땡큐.

뒤를 사람들이 올라오는 모습을 본다.

연장자인 기혁 형님도 짱짱해 보이고 진석 형님은 워낙 티를 안 내니 힘이 드려나? 잘 모르겠다.

찬진형님은 드러누었다 씩 웃는다.

영길이도 이제 날이 밝으니 방언이 곧 터지겠지.

사방에 눈에 훤히 들어오면서

하늘을 향해 혼자만의 기도를 올리고 마음을 다잡는다.

가보자.

빙하가 시작되는 곳에서 크램폰을 착용한다.

해가 떠오르기 전까지는 추위가 예상되지만 아직까지는 참을만하다.

악사이 빙하를 따라 크레바스 지대를 무사히 지나간다.

경사가 있는 곳에서 안자일렌을 하고.

흰 산 경험이 많은 형님들이 조용히 뒤에서 받쳐주니 든든하다.

간간히 뒤를 돌아볼 때는 무서움에 아득했다가도

저 아래까지 뻗은 눈을 보면 여기서 떨어져도 죽지는 않겠지라는 쓸데없는 망상을 하기도 했다.


코로나봉 한가운데 이르자 태옥 씨가 줄을 건다.

찬진 형님의 확보.

그 자세가 무릎을 꿇고 있어 자못 경건해 보이기까지 한다.

치 4천 미터애 서도 담배를 피우는 희성이는 태옥 씨에 이어 두 번째로 오른다.

그간 연습했던 주마링을 이럴 때 하는구나.

마음은 후다닥 오르고 싶은데 두 발은 느릿느릿.

이곳 애 머무는 며칠 동안 날씨가 더할 나위 없이 화창해 고마웠다.

원정대장인 진석 형님이 간간히 무전을 하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여온다.

우치텔을 오르던 석봉 형님은 홀로 중도 하산을 했다는.

당신은 베이스캠프까지만 가도 성공이라던 형님의 말씀이 스쳐간다.

나도 형님처럼 저런 산꾼이 될 수 있을지.

감히 꿈꿔본다.

홀로 뒤돌아서는 형님의 발걸음을 생각하니 묵직한 뭔가가 올라온다.


다시 등반 시작.

고정자일을 설치해 가며 오르는 태옥 씨의 발가락이 염려된다.

저 앞에 있으니 가만히 지켜보는 수밖에.

낙석지대를 모두 조심스레 통과하고.

드디어 오후 한 시.

정상에 올라선 희성이의 고개가 바위 위로 빼꼼히 보인다.

깃발을 들고 있는 두 사람을 쉴 새 없이 사진 찍는 찬진형님도 보인다.

아래에서 대기 중인 진석 형님의 무전소리.

무전기 너머 건영 형님이 등정 공식 시간은 13:36분이라는 말이 들려온다.

형님.

정상 처음 오른 시간은 한시를 좀 넘긴 시간이어요.

혼자 속으로만 말하고 가만히 듣고만 있는다.

사면에서 대기 중이던 진석 형님, 기혁 형님까지 모두 무사히 한자리에 모였다.

바위를 올라야 하는데 입구를 계속 못 찾았다는 태옥 씨.

오른쪽으로 트래버스를 해야 하는데 거기까지 가서 암벽등반을 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라고 판단했단다.

희성이에게 의견을 물으니 오늘은 여기서 하산하기로 결정.

아마 인원이 적었다면 시도했을 텐데…

나 때문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컸다.

우리가 오른 곳이 정상이지.라는 진석형 님의 명언.

정상에 서면 양석봉을 외쳐달라는 형님의 주문을 영상에 담고는 하산을 서두른다.

형님, 들렸죠?

이상하리만치 정상에 대한 감흥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차분해지는 건 무엇 때문인지..

찬찬히 사방을 바라보고는 이제 다시 하강 준비.

등정보다 중요한 것이 하산이라는 걸 익히 알기에

내려갈 길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는다.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야 하는데 몸이 지쳤는지 속도가 나질 않는다.

안전하게 하산하려고 안자일렌을 한다.

이렇게 마지막까지 하나로 이어져 내려온다.

덕분에 무사히 밤 9시가 넘어 무인산장에 도착한다.

너덜길에 넘어져 스틱이 부러지긴 했지만 나는 크게 다치지는 않았으니까.

다들 어두운 너덜길을 내려오면서 고생을 좀 했을게다.

산장 인근 불빛이 멀리 보이니 속도가 더 쳐진다.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배는 고픈데 다들 뭔가를 먹을 생각이 없어 곧장 잠자리에 든다.

이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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