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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스스탄 여행-다시 베이스캠프

아, 단장님!

by 날아라풀

2025-09-04

늦도록 잠을 자고 싶었는데.

체력왕 찬진 형님은 오늘도 역시 부지런히 아침을 준비한다.

덕분에 강제 기상을 하고.

하산할 채비를 한다.


오늘은 베이스캠프로 내려가는 날.

하루를 우리에게 온전히 내어준 무인산장에서 마지막 기념 촬영을 해본다.


오늘은 서두르지 않고 여유 있게 주변을 쳐다보면서 내려가리라.

희성이를 비롯한 다른 형님들은 벌써 저 앞에서 멀어졌다.

그 옆을 태옥 씨가 나란히 걷는데 영길이는 배낭 두 개를 짊어지고 앞서 걷는다.

발가락이 계속 아픈지 내딛는 발걸음이 힘들어 보인다.

태옥 씨와 짐을 나눠 들고는 다시 출발.

안전지대로 내려와 등산화로 갈아 신고는 훨훨 날아가는 영길이.

살 것 같단다.

다행이다.

빙하지대, 크레바스를 지나친다.

이 눈길을 또다시 올 수 있을까?

꼭 한번 사람들과 이 빙하길을 걸어보고 싶다.

푹 빠지던 눈 웅덩이도 자주 떨어지던 낙석도 이제는 안녕이다.

길 모퉁이를 지나면서 더 이상 코로나봉도 보이지 않는다.

느리게 걷는 사이, 사람들은 어느새 저 너머로 더 멀어졌다.


아주 잠깐 이곳에 머물렀을 뿐인데.

더는 눈이 밟을 수 없는 곳을 벗어나려니 묘한 슬픔이 올라온다.

뭐라 설명할 길이 없는 알 수 없는 감정이다.

내 욕심으로 올라온 길에 여럿 민폐를 끼칠까 조바심 나던 며칠이기에 더 그랬던가?

하염없이 생각의 웅덩이에 빠졌다가 너덜 바위에 보란 듯이 넘어졌다.

곧 공포의 너덜이 펼쳐질 텐데 뭔 청승이냐고 산이 말한다.

이런 내가 얼마나 웃길꼬?

삶은 이렇게도 다양한 모습으로 나를 일깨워준다.

언제 그랬던가 정신이 번쩍 든다.

하나 남은 스틱도 제대로 두 동강이 나버렸다.


저 길을 무슨 수로 내려가나?

하염없이 난감한 너덜길을 쳐다보고 있는데 태옥 씨가 쓰던 스틱을 무심히 건넨다.

본인 발가락이 더 아프면서.

이렇게 또 민폐를 끼치는구나.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내 차지.

미안하고 고맙다.


발걸음이 가벼워진 영길이도 어느새 안전지대인 호숫가를 가로지르며 걸어간다.

공포의 너덜지대를 무사히 통과하고 나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때부터 딱 그만 걷고 싶어 져 걸음은 더욱 느려졌다.

천천히.

천천히.

한 걸음씩 걷다 보니 멀리 석봉 형님이 보인다.

마지막으로 하산하는 태옥 씨와 나를 배웅 나오셨다.

고생했다.

건네는 이 한마디.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이 먼 땅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가이드 한 명뿐인 이 산속에서.

홀로 밤을 보내며 하산하는 후배들을 기다려준 석봉 형님.

단장인 내가 여길 지켜야지.

대수롭지 않은 듯 건네는 이 한마디 말에 담긴 정이라니.

나도 저런 선배가 되야겠다고.

되지도 못할 꿈을 꾸게 만드는 형님.

고맙습니다.


이렇게 다들 무사히 라첵산장으로 돌아왔다.

그걸로 이번 원정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악사이 산군에서의 마지막 밤을 조촐하게 맥주 한잔으로 마무리한다.

태범형님이 만들어주신 아크릴 조명이 빛을 발하는 시간이다.

짐을 하나씩 꾸리고 나니 이곳에서의 마지막 날이 실감 난다.


악사이 산군에서 멍하게 보낸 며칠.

제대로 한 거라고는 없는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 덕분이었다.

도움만 받는 원정이 도움을 주는 원정이 되기를 바라며...

별을 올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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