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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풀 Sep 16. 2016

먼 산, 그러나 가까운 꽃

지리산에서 당신에게

대충 꾸린 배낭을 메고 구례구역으로 향했다.
한 밤, 짙은 불빛으로 하늘의 별들은 흔적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언뜻 봐도 일어설 수조차 없어 무거워 보이는 박 배낭을 짊어진 네댓 명의 사람들이 역에서 함께 내린다.
'이들과 함께 걷겠구나.'
그러나 새벽 열차 시간에 맞춰 잠깐 역 앞을 들르는 특별 버스 운행 시간을 잘못 알고 한참을 여유를 부렸던 나는 화장실을 나와 텅 빈 역사를 둘러보고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가만히 주위를 살펴보니 조금 전 불이 켜져 있던 길 건너 식당은 어느샌가 어둠 속에 잠겨 있고 차라리 혼자가 나았을 그 역 안에는 이미 푹 잠들어 있는 아저씨 한 명과 나만이 외따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운이 좋았던지 친절한 역무원이 TV며 선풍기 전원을 켜주고는 안에 있으니 언제든지 필요하면 부르라는 말과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다음 버스는 날이 새야 가능하니 뉴스를 잠깐 보다 대합실 안으로 들어가서 잠깐 눈을 붙였다.
 깜빡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났는지 갑자기 대합실이 어수선하더니 배낭을 멘 어르신 한 분이 내린다.
구례터미널에서 첫 버스를 타려면 역 앞에서 택시를 타야겠다는 생각에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한 여름인데도 거리는 스산하다.
택시 정류장에서 한참을 있으려니 아까 역에서 마주친 아저씨가 성삼재까지 간다며 함께 택시비를 나눠서 타고 가잔다.
구례구역에서 성삼재까지는 대당 4만원, 둘이면 이만원인데 난 시간 여유도 많아 굳이 서울 내려온 만큼이나 비싼 차비를 들여 갈 필요가 없어 사양했더니 만원만 부담하란다.
어차피 본인은 4만원 내고 올라갈 생각이었다며...
'뭐 이런 행운이...'
덕분에 편하게 성삼재를 올랐다.
고마움의 인사도 건네기 전에 아저씨는 일행을 만나야 한다며 어느새 멀어져 버렸다.

이제부터 진짜 홀로 걷는다.
얼마 만에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건지 살짝 설레었다. 물론 쓸쓸하기도 할 테지만...

오전 06:08 드디어 출발이다.
기분 좋은 햇살을 따라 이 대기의 공기를 들이켜본다.

'지리산신이여. 잘 부탁드려요.'
노고단 대피소에서 겹겹이 둘러싸인 산등성이를 밥상 삼아 전날 사온 김밥을 꺼내 아침 식사를 한다.

노고단 인근 지리산 풍경

노고단을 지나 임걸령샘, 노루목까지는 비교적 완만한 흙길과 계단이 반복되었다.

지나가는 길목마다 시선을 끄는 꽃잔치를 구경하느라 절로 걸음이 더뎌졌다.

임걸령에 만나는 꽃잔치

안개가 자욱한 삼도봉에서 잠시 배낭을 내려놓았다. 여름 지리산은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는 곳인지 도무지 홀로 걸을 틈이 없어 살짝 아쉬웠다.

안개에 묻혀 바로 앞만 바라볼 수 있었던 삼도봉

10시경 삼도봉을 지나 화개재, 토끼봉, 명선봉까지는 지루한 너덜길이 이어졌다.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전날 사온 숯불고기 김밥은 얼음물 아래 있었던 덕분에 상하지 않고 맛난 한 끼가 되어주었다.

홀로 길을 떠나는 내게 친구가 정성스레 싸준 시래기나물볶음을 곁들여 먹으니 든든하다.

아주 오래전 이 길을 함께 그 친구와 걸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 날 이후 산은 내 마음속에 깊이 들어왔고 이렇게 가끔 훌쩍 떠나고 싶을 때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되었다.

비를 머금고 있던 연하천대피소

잔뜩 흐린 하늘이더니 그 잠기는 풍경의 연하천대피소에 약하게 비가 내렸다. 그냥 맞으며 걸어도 좋을 만큼 적은 양의 비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연하천에서 벽소령대피소까지 꽃, 길, 하늘

여유를 만끽하며 지루한 내리막길을 걸으니 어느새 오늘의 쉼터인 벽소령대피소에 닿았다.

햇살이 머무는 벽소령대피소

오랜만에 찾은 대피소는 깨끗하게 새단장을 마쳤다. 생각지도 못했던 1인 숙소라니...

첫날 벽소령 대피소에서 나의 편안했던 잠자리

뭔가 산에 올라와 호강을 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진정한 호사는 산행 내내 친구가 싸준 밑반찬에 먹은 끼니들이었다.

내게 먹는다는 것은 늘 생존이었었다.

더군다나 산에서의 끼니는 나를 지탱하는 온 힘이거늘 친구의 정성은 걷는 내내 내 발걸음에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다.

혼자 걸었으나 마냥 쓸쓸하지만은 않았던 이유는 친구의 이런 따뜻한 마음씨 덕분이었다.

끼니때마다 나에게 힘이 되어주던 친구의 반찬들

고마운 마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맛난 밥상을 지리산에서 차려 먹었다. 이렇게 친구는 나와 함께 걸어주었다.

밤 9시에 취침을 하고는 하늘의 별이 궁금해 새벽 4시에 홀로 밖으로 나왔다.

그토록 무더운 저 아래의 온도와는 확연히 다르게 바람이 스산했다.

어둠에 잠긴 산 위의 별들은 제대로 그 빛을 발하며 조용히 반짝이고 있었다.

홀로 숨죽이며 이 고요 속에 잠겨 있으니 행복한 충만함이 내 안에 스며드는 느낌이 일었다.

그렇게 새벽을 맞으며 또다시 산속에서의 하루를 시작했다.

지리산에서 만나는 고운 여름꽃들

둘째 날은 다음 대피소까지 거리가 여유로워 천천히 준비를 하고서는 아침 8시경 대피소를 출발했다.

흙과 돌이 뒤섞인 길을 번갈아 걸으며 도착한 선비샘에서 마음껏 목을 축이고는 칠선봉과 영신봉에 도착했다. 철계단과 나무계단을 번갈아 올랐다.

조망은 제법 좋았으나 안개 때문에 아쉽게도 근거리만 볼 수 있었다.

안개에 잠긴 지리산길

12시에 세석대피소에 도착해 한 시간여 주변을 바라봤다. 넓게 펼쳐진 선경이 안개에 가려 아쉬웠으나 곳곳에 펼쳐진 꽃들이 시선을 오래 머물게 했다.

숲 속에 그윽하게 잠긴듯한 세석대피소

세석에서부터 촛대봉에 이르는 길은 온통 산오이풀과 구절초가 만발해 있었다. 연하봉을 걷기까지 한참 동안 '좋다.'를 연발하며 걸었다.

'꽃의 그늘'

당신이 두고 간 마음자리에 나 살며시 머물다 갑니다.
구름이 설핏 지나가고 다시 볕이 고개를 내밀 때
그늘진 자리에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곳에서도 환히 빛나네요.

안개가 자욱한 일출봉 부근의 꽃들과 주목은 발걸음을 계속 붙들 만큼 그윽했다.

그렇게 느리게 걸어 오후 3시경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했다.

지리산의 큰 쉼터, 장터목대피소

대피소에서 짐을 풀고 나니 어쩐지 할 일을 다 마친 기분이 들었다.

닿을 수 없어 마음 곁에만 두었던 사람처럼 지난 이틀 동안의 풍경은 내게 가까웠다 멀어졌다를 반복했다.

때론 행복했고 가끔은 쓸쓸했던 지리산의 풍경

산에서 머무는 마지막 밤은 여름이 무색할 정도로 바람이 차가웠다.

한참 동안 사방에 펼쳐진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쏟아진다는 말로는 부족한 하늘 가득 펼쳐진 새벽 별을 바라보며 천왕봉으로 향했다.

숨을 멈추게 만드는 천왕봉의 일출

소용돌이치듯 출렁거리는 파도의 길을 찾을 수가
없어 오래 머뭇거리다 겨우 걸음을 떼었다.

한국인의 정기 발원지, 천왕봉

잠시도 틈을 내어주지 않는 하루의 무게를 짊어지고 다시 길을 떠난다.


저 멀리 구름바다를 건너 그곳으로...

먼 산,

그러나

가까운 데 있었던 꽃을 마주한 며칠이 있어 다시 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내게 너무 멀리 있는 산, 당신처럼 아득한 풍경 속에서 환하게 밝은 꽃처럼 가까이 있는 희망을 꿈꾸며 길을 내려왔다.


'안녕,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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