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자의 약속, 설악산 코락길
벽을 만났다.
이런 까마득한 느낌이 대체 얼마만인지...
아직 단풍이 채 내려오지 않은 시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위가 온통 붉은색으로 보였다.
갑자기 그 색채로 인해 마음이 무거워졌다.
꿈에서 보던 바위의 모습과 비슷한 것이 나는 여길 올 운명이었나 보다 하면서 마음을 좀 추스르면 좋았을 텐데 '저길 대체 내가 오를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온통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선배들의 여유로운 오름 짓을 보며 난이도가 짐작은 되었으나 막상 내가 오르려니 언제나 그렇듯 첫마디를 오르는 일은 너무 버거워서 몸이 더욱 뻗뻗하게 굳은 채로 올랐다.
두 번째 마디도 우왕좌왕하며 올랐다.
뒤따르던 선배님이 이 길을 왜 이렇게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오르느냐고 갸웃거린다.
내가 내 몸에게 하고 싶은 말인데... 남들 눈에도 버벅거리는 부자연스러운 몸짓은 잘도 눈에 띄나 보다.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는 세 번째 마디를 올랐다.
도무지 숭숭 뚫려있는 구멍 바위말고는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이 날 코락길은 쉬운 길은 단 한 피치도 없었다.
자꾸만 '분명히'라며 글을 끄적이는 이유는 가물거리는 불확실한 기억 탓이리라.
그만큼 나는 어려움에 쩔쩔 매고 있었다.
선등자의 움직임이 심상찮다.
어려운 길을 만났나 보다.
나도 모르게 긴장감에 쪼그라드는 느낌이다.
아니나 다를까 약간의 오버행에다 한눈에 봐도 어려운 마디와 부딪혔다.
뒷줄을 거는 팔은 후들거려 자꾸 줄을 놓치고 먼 양발 사이는 좀처럼 편하게 딛지를 못하니 크랙에 얼굴에 처박고 한참을 헤매었다.
여기가 난이도 5.9 밖에 안된다고?
거짓말이 틀림없다.
아니면 개척자가 키가 큰 사람이었거나...
내 짧은 팔과 다리로는 도저히 오른쪽 벽을 디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이 짓을 왜 하고 있을꼬?'
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내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떨어지는 담력, 한참 부족한 실력...
이건 도무지 등반자의 자세가 아닌 것이다.
하강하는 중에 발 밑을 지나가는 도마뱀을 보았다.
공중에 붕 떠 있는 것도 모자라 쓰윽 스치는 작은 뱀을 만나니 콩당거리는 가슴에 나도 모르게 자일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시작부터 무서움에 마음을 못 잡더니 끝까지 이러는 건가...
그렇게 두려움에 떨면서 하산을 했는데 코락길을 뒤돌아보며 나도 모르게 다시 찾아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 등반일수록 꼭 다시 오고 싶어 지지만 이제 그 날을 돌이켜보니 그건 내 오기가 만든 기억의 조작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토록 헤매며 정신줄을 자주 놓은 그 길을 다시 오르고 싶어 한다는 건 분명 내가 미쳤거나 아니면 등반 욕심에 나도 모르게 기억을 미화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 길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