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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풀 Oct 02. 2017

천국의 겁쟁이, 설악

한 편의 시를 위한 길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는데 진즉부터 건너편 방에서는 바스락 소리가 한창이었다.

창문 너머 울산바위가 어둠 속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칠흙의 시간.

함께 자리에 누운 언니, 동생이 깰까봐 움직임이 조심스러워졌다.

의식만 멀뚱거리고 있을 때쯤 다행히 언니가 먼저 어둠을 밝혔다.

하나 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전날 사온 김밥과 컵라면으로 대충 허기를 채우고는 오전 7시 전에 들머리에 들어섰다.

일찍 서두르기를 잘했다며 방긋거리는 형님의 미소가 싱그러운 아침이다.

새벽 4시 30분부터 일어나야 한다며 뒤척거리던 형님이었으니 이 정도면 잘한건가 싶어지는 순간이다.

생각보다 짧은 어프로치를 시작으로 등반을 2개조로 나눠 시작해 본다.

거의 일년만에 다시 온 설악.

그 긴 시간만큼 얼굴본지가 한참이나 지났던 어린 동기 녀석은 오래전 이 길을 등반하고는 암벽등반을 결심했다던 누님의 소회가 기억나 이 길을 함께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저 아무 생각없었는데...

어쩌다보니 말번을 서게 되었고 칼능선이 주는 두려움 때문에 1피치부터 긴장을 하다 등반 내내 한참을 떨어야했다.

고소가 주는 아득함 때문에 겁이나 등반을 주저하는 나를 보고는 머리통을 쥐어 박으며 "이게 무슨 고도감이냐"고 핀잔을 주는 형님이 야속했다.

고소는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게 아닌데 그가 느끼기에 이 정도의 높이에서는 나의 떨림이 엄살로 보이는게 분명했으리라.

멀리 펼쳐진 토왕폭의 선경에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고 다리가 후들거려 단 한 순간도 낭떠러지 아래를 바라보지 못했다.

밑이 보이지 않는 1~2미터의 클라이밍 다운조차 머뭇거리는 나 때문에 오후 2시에는 끝나리라던 등반은 오후 다섯시가 되어서야 겨우 마칠 수가 있었다.

설악이 지닌 풍경을 나는 이번에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아마도 나같은 겁쟁이는 이 천국을 온전히 누리는 날이 오기란 저 절벽만큼이나 까마득할 것이다.


누군가 내게 '마음의 힘'을 키우라고 했었다.

분명 어떤 이에게는 한 편의 시를 떠올리게 할 만큼 아름다운 천국이었을 그 길을 겁쟁이인 나는 두 다리에 남겨진 멍자국의 잔상처럼 두려움만으로 시퍼렇게 채워졌다.

누리지 못한 천국은 그래서 또 미련만이 남는다.


설악, 그 한 편의 시는 이 가을에도 여전히 쓰여지지 못했다.

겁쟁이에게 저 천국은 닿을 수 없는 아득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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