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가치...
두 번째 가면 뭔가 다를 줄 알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오만함은 속에 가지면 안 되는 몹쓸 감정이다.
분명 그랬다.
나는 좀 자만했었다.
이미 한번 가본 길이니 잘 갈 수 있을 거라고...
전에 선배님들을 따라 갔던 전암의 어프로치가 아닌 낯선 길이 나올 때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뒷모습만 보며 따르던 10여 명의 동기들과 선배들의 얼굴을 차마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괜찮다며 털털한 웃음을 지어주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에 두리번 거리는 고갯짓과 갈팡질팡 두 다리가 숨 가쁘다.
한참을 헛돈 것 같은데 대체 여기가 어디인가 감조차 오질 않아 연신 땀이 쏟아지는데 멀리서 낯익은 선배의 빨강 웃옷이 확 시선을 끌었다.
'다행히 제대로 왔나 보다.'
끌어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기뻤는데도 내 몸은 뻗뻗한 인사만 해댄다.
이럴 땐 헤시시 기쁜 표정을 날려도 좋으련만 이 메마른 얼굴이라니...
그래도 뭔가 안도감에 어깨가 가벼워짐을 느낀다.
삶은 결코 자기 자신은 절대 속일 수 없다는 진리를 몸으로 부딪히며 깨우쳐준다.
모처럼 함께하는 동기들과의 등반에 대한 설렘이 나의 길 헤맴으로 살짝 빗나갈 뻔했지만 다들 개의치 않고 걸으니 그저 고마운 마음이다.
게다가 암장은 우리 팀밖에 없는 조용한 천국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우리를 위한 준비된 암장인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으니까...
이름 아침부터 도착해 여럿인 우리 동기들을 위해 선배님들은 벌써 줄을 다 걸어둔 모습을 보니 여긴 확실히 자연과 사람의 낙원이 맞는구나 싶다.
운동 한번 제대로 안 하고 오랜만에 바위에 오르는 길인데 그걸 알 턱이 없는 선배들이 1 피치를 선등 하라고 한다.
만만해 보인 걸까?
해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동해 줄을 깔 요량으로 매듭을 묶었다.
내 짧은 등반 여정에 첫 길잡이다.
이걸 레벨로 치나 궁금했는데 나중에 보니 5.6이다.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좀 더 많은 경험을 한 후에 제대로 서봐야지 마음 먹고는 2 피치 앞에 섰다. 길을 오르지 못하고 한참을 버벅이고 있으니 모두들 나를 장난치지 말라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경험 부족과 운동 부족은 이렇게 나타나나 보다.
다른 동기들은 훌쩍 오르는데 이건 분명 짧은 키 때문이 아니라 노력 부족인 거다.
행여 선등 해봤다고 우쭐거릴까 신께서 내게 그 길을 이리 알려준 것이 아닐는지...
뒤이어 오는 동기의 확보를 내가 제대로 볼 줄 몰라 한참 동안 자일이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좀 모자란 것 투성이구나 싶어 졌다.
그렇게 멍을 때리며 서 있다가 나도 모르게 제대로 확보를 안 하고 있다는 선배님의 한마디에 다시 정신줄을 잡았다.
충분히 앉아 쉴 만큼 넓은 공간이어 다행이었으나 난 등반에 가장 기본인 자기 확보 하나 제대로 못하는 어리석음을 또 한번 발견해야 했다.
게다가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갑자기 벌 한 마리가 내 발목을 쏜다.
처음이라 얼떨떨한 내게 선배님이 침착하게 얼음을 깨서 건네준다.
좀 아프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정신을 차리는구나.
3 피치는 아주 덜덜 거리다 확보의 힘으로 억지로 정상을 디뎠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역시나 몇 달이 지나도 변함없이 내겐 너무 어려운 난이도의 오름길.
노력하면 나도 언젠가는 사뿐히 저 길에 이를 수 있으려나 생각해본다.
내가 디디는 만큼 이를 수 있는 등반은 언제나 정직한 것 같아 좋다.
삶 또한 그리 해야 하리라.
조바심을 내지는 말되 자만하지 말고 남들과 함께 가야 하는 이 길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치로운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잠깐이지만 생각해보게 된다.
다 함께, 정직하게 이르자.
고맙다. 암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