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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풀 Mar 29. 2022

힘룽 히말 가는 길 13

겨울 그리고 다시 봄

새벽달을 보며 구보를 시작한다.

구령에 맞춰 발걸음도 가볍게였으면 했는데 아.니.다.

무겁다.

이른 새벽인데도 누구 하나 싫은 소리 한마디가 없다.

스스로 선택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때론 짜증이 나는 나의 이 얄팍한 의지와는 다르게 사람들은 어떤 결연함이 있는 건지 어둠 속에 그들이 환하게 느껴진다.

설악에서의 훈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자가격리에 들어가 훈련에 참석 못한 영규 형님이 너라면 열 번도 더 왔다 갔다 할 길이라며 잦은 바위골 훈련을 염려 말라고 격려하셨다.

가뜩이나 느린데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맨 앞 대열에 섰다.

뒤에 오는 사람들이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면 괜히 마음이 부산스러워졌다.

땅을 보며 걷느라 풍경은 스치듯 지나쳐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폭포에 가까워질수록 길은 오묘했다.

홀로 걷고 있었다면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50M 폭을 처음 마주했을 때는 그저 안도의 숨이 나왔다.

오늘의 할 일을 다 마친 느낌이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불편한 배낭을 내려놓으니 조금 숨통이 트인다.

그때서야 계곡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을 쓰윽 둘러보니 기울어질 듯한 바위가 멀리서 고개를 갸웃하며 안녕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도 마음으로 인사를 건넨다.

잘 부탁할게.

잠시 숨을 고르기가 바쁘게 사람들은 장비를 착용하고 빙벽을 오른다.

사람들의 훈련에 방해될까 조심스러워 어둠이 산으로 내려오기 전 얼음을 디뎠다.

금세 끝날 것 같던 벽이 막상 오르니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왜 이렇게 늦게 오르냐고 호통치는 대장님의 목소리가 온 계곡을 울린다.

힘들게 오르고 있는 내 모습을 보는 김진석 이사님이 흡사 낭가파르밧 벽에 다다른 모습이라며 애써 웃음을 안긴다.

일부러 따뜻한 물을 나눠주려고 가상 베이스캠프에서 내려온 숙경 언니와 태옥 씨가 고맙다.

눈비가 내리는 이곳에 싸늘함을 녹여주는 따뜻함이 전해졌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멀리서 잠시 바라본다.

온종일 버거웠던 몸을 침낭에 구겨놓고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들으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부실한 내 침낭을 염려한 서우석 국장님이 당신의 침낭 커버를 씌워 주신다.

국장님도 춥고 힘드셨을 텐데 사람들에게 괜히 민폐가 된 하루였던 것 같아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바랐는데 지금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의 꿈이 욕심이지는 않았을까?

쉬이 잠들지 못하고 밤새 뒤척이며 아침을 맞았다.

그때 알았다.

이렇게 나의 겨울이,

동계 훈련이,

완전히 끝났음을...

가만히 사람들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며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동안 수개월을 함께하면서도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을 가만히 건네본다.

안녕하신가요?

당신의 몸과 마음 모두?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나요?

그동안 힘들지는 않았나요?

포기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견뎠나요?

아프지 말고 씩씩하게 부디 내내 안녕하세요.


지금까지 그들과 함께했던 일들이 내 마음속에 길을 만들었다.

같이 웃고 함께 기뻐하며 때론 속상하고 홀로 괴로웠다.

힘룽 히말을 향한 이 길이 욕심이 되지 않도록 열심히 즐기며 부딪히자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다짐했다.

반짝거리지는 않아도 따뜻하기를 바라며 걸었던 길이었다.


그토록 좋아하는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왔다.

마음을 다잡으며 끝이 아니라고 써내려 가다 지우기를 반복한다.

차마 이 훈련 기록은 끝을 내지 못할 것 같다.


봄이 일어서니

내 마음도

기쁘게 일어서야지

나도 어서

희망이 되어야지


누군가에게 다가가

봄이 되려면

내가 먼저

봄이 되어야지

-이해인님의 시 '봄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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