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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임 Mar 07. 2021

13. 엄마의 노래를 기억하시나요

자장가와 희망가

 

  노래에 재주가 없다. 재주 없는 것을 해야 하는 노래방을 싫어한다. 자발적으로 신이 나서 노래방에 가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노래는 자고로 듣는 것이라 여기며 살았다. 아이가 생기고 나니 노래를 불러야 할 때가 많아졌다. 오늘도 아침 먹다 말고 2호와 함께 어린이집 등원송을 불렀다.


  1호가 아기일 때는 늘 자장가를 불렀다. 열 곡이고 스무 곡이고 떠오르는 동요를 흥얼거리듯 불렀다. 잠자리 독서를 시작한 뒤로 자장가를 부르지 않았다. 5살이 되었을 때인가, 어느 날 1호가 잠들기 전에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다. 별생각 없이 시작한 자장가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나는 대체로 4곡만 부른다. 시작은 늘 섬집아기이고 메기의 추억, 클레멘타인을 거쳐 연가로 끝이 난다. 가끔 앙코르곡으로 “최여름 너무 좋아요, 최이든 너무 좋아요”라는 나만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1호는 웬만하면 노래가 다 끝나기 전에 이미 잠이 들고, 2호는 노래가 다 끝나도록 자기만의 시간에 빠져 뒤척거리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은 잠자리에 든다고 해서 제자리에 곱게 누워 자장가 들을 준비를 하지는 않는다. 둘이서 장난도 치고 나를 사이에 두고 이리저리 넘어 다니며 엎치락뒤치락 난리를 친다. 짐짓 점잖고 부드럽게 “이제 그만. 잘 시간이다.”, “자기 자리에 눕자.”, “안 잘 사람은 거실에 나갈까.” 하며 잠자리를 단속하다가 결국 속에서 부글거리기 시작한다. “그만. 그만해라!”, “안 잘거니!”, “안 잘 거면 나가!”까지 하고 나서야 조용해진다. 자리를 정돈하고 누우면 어김없이 1호가 말한다. 

    

“엄마, 노래 불러줘.”     


  하…. 노래라는 것이 말이랑은 다르지 않은가? 방금까지 속이 끓어오르는 것을 간신히 눌렀는데 바로 플레이 버튼이 작동이 되냔 말이다. 아이들에게 이런 나의 속사정 따위는 관심 밖의 문제다. 어느 날은 내가 무슨 주크박스도 아니고 노래 불러달라는 말에 더 속이 부글거려서 최대한 낮은음으로 “오늘은 그냥 자라.” 하고 내뱉는다. 어떤 때는 이게 먹히지만 또 어떤 때는 지독하게도 기어이 주크박스를 작동시킨다. 마치 그런 기분일 것이다. 남편과 전화로 대판 싸우고 있는데 전화가 끊겨버려서 다시 남편에게 전화를 걸라치면 ‘내 반쪽’이랄지 ‘내 짝지’랄지 ‘내 사랑’이랄지 아무튼 이런 호칭을 다정스레 불러야 음성인식으로 전화가 걸리는 그럴 때의 기분. 전화는 손으로 걸 수라도 있지만 엄마가 불러주는 자장가를 대신할 만한 것은 없다. 한마디로 울화가 치민다는 거다.      


  입술을 굳게 닫은 다음 한숨을 한 번 길게 내리 쉬고 나서 노래를 시작한다. 노래라는 게 어딘가에 힘을 주면 불러지지가 않는다. 더군다나 아주 살살 조용조용히 읊조리듯 불러야 하는 자장가는 더 그렇다. 일단 시작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명치 위로는 힘을 빼야 한다. 희한하게 그렇게 힘을 빼고 노래를 시작하고 나면, 정말 희한하게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노래를 시작하고 아이들이 잠잠해지고 잠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 느껴지면 나의 마음도 한 풀, 두 풀 꺾여서 가라앉는다.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싶어 아득하게 느껴지는 때도 있지만 엄마의 목소리를 따라 잠에 빠져드는 아이들을 보면 이 짓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해야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언젠가 커서 자기 전에 들었던 노래들을 만났을 때 ‘엄마가 자기 전에 불러주던 그 노래’라는 것을 떠올리며 잠에 스르르 들던 그 느낌을 다시 느낄 수 있게 말이다.      


  다른 엄마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 엄마의 노래를 들어본 일이 거의 없다. ‘엄마의 노래’라는 말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딱 하나 있다. 거실에 엎드려 걸레질을 할 때면 늘 흥얼거리던 노래가 있었다.      


“이 풍-진 세상을 마-안나았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우려었으-면 희망이 조옥할까”     


더 길게 이어진 가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다. 항상 저 구절을 걸레질하는 손의 속도에 맞춰 느릿느릿 흥얼거렸다. 엄마를 보내고 한참이 지난 어느 날 같은 자세로 거실을 닦다가 이 노래가 문득 생각이 났다. 기억하는 가사를 따라 찾아보니 있는 노래였다. 제목은 ‘희망가’였다. 엄마는 그 노래의 제목이 희망가인 줄을 알고 불렀을까. 알았겠지. 알고 불렀겠지. 그 제목에 어떤 의미를 두었을까. 그냥 그 노래가 흘러나와서 불렀을까. 노래의 제목을 알고 나서 나는 왠지 좀 슬퍼졌는데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그 노래를 불렀을까, 물어볼 수도 대답을 들을 수도 없게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노래는 이렇게 좀 슬픈 이야기다. 나의 노래는 우리 아이들에게 ‘좀 슬픈’ 그런 노래이고 싶지 않다. 자장가가 끝나고 나면 무슨 노래를 이어서 부를까 가끔 고민해본다. 부를 노래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집에 늘 음악을 켜 둔다. TV가 없는 대신 아침에 눈 뜨면 바로 음악을 재생시킨다. 어느 날은 팝으로 어느 날은 클래식을 또 어느 날은 가요도 튼다. 아이들이 틀어달라고 하는 만화 주제곡을 틀기도 한다. 놀다가 흘러나오는 음악이 흥겨우면 같이 일어나 춤을 추기도 한다. 나중에 아이들이 자라서 ‘우리 엄마는 늘 음악을 듣곤 했죠.’라는지 ‘어, 이 음악 엄마가 자주 틀어주던 건데.’ 같은 얘기를 한다면 참 좋을 것 같다. 아니, 나중까지 갈 것도 없이 지금 이 순간 아이들과 같이 노래를, 음악을 즐기고 이 즐거운 느낌을 오래오래 간직해 준다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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