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달 만에 맞은 휴가였다. 혼인 서약서에 서로에게 한 달에 한 번씩 (어떤 형식이든 상관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휴가를 주자고 썼다. 그때는 한 달에 한 번이라는 숫자가 그리 잦은 것인 줄은 몰랐다. 한 달에 한 번은 고사하고 분기별로 한 번씩 가는 것도 이런저런 사정 다 따지고 나면 쉽지 않았다. 그래도 갖은 열정을 짜내서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가려고 노력한다. 이번에는 일 년을 넘기지 않았다. 다행히.
남편의 회사는 쉬는 날이 귀하다. 이틀을 연달아 쉬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지난 일요일, 월요일 쉬게 되었다. 애들 데리고 멀리 놀러를 갈까, 나 혼자 휴가를 갈까, 1호만 데리고 갈까, 그냥 집에서 다 같이 쉴까…. 이미 호텔까지 다 예약해놓았으면서 최 씨들과 헤어지고 돌아서는 순간까지도 갈등했다. 넷이서 동백섬 산책 나왔다가 셋과 하나로 갈라졌다. 나는 진짜 혼자가 되었다. 날은 어둑해지고 빗방울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분식집에 가서 김떡순 삼종세트를 좀 과하게 포장해서 예약해둔 호텔로 서둘러 갔다.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올라가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딱 필요한 것만 걸치고 TV를 켠 다음 저녁을 먹는다. 실로 오랜만에 리모컨 독차지하고 볼 것도 더럽게 없다 하며 정서불안인 것처럼 채널을 마구 돌린다. 그러다 TV는 혼자 떠들게 놔두고 핸드폰을 들어 유튜브를 켠다. 역시, 스킵 기능이 있어야지. 아우 속 시원해하고 혼자 중얼거린다. 배 두드리며 창가에 놓인 긴 소파에 누운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닌 채로 있다가 시계를 보니 8시다. 아차, 목욕탕이 9시에 문을 닫는다지. 남은 음식은 대충 덮어놓고 다시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지하로 내려가 온천수가 흘러넘치는 목욕탕으로 간다. 혼자 목욕탕이라니. 샤워하고 뜨끈한 탕에 몸을 수-욱 집어넣는다. 묘한 미소와 함께 깊은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아, 좋다 하는 소리가 온천수같이 흘러나온다. 그래 봤자 30분. 옷을 다시 걸치고 나오는 데까지 30분이면 족하다. 방에 가기 전에 편의점에 잠시 들러 주전부리할 것은 고른다. 맥주라도 한 잔 하면 좋겠지만 이제 진짜 술은 안 되나 보다. 캔 맥주 하나도 엄두가 안 난다. 컵에 담긴 시리얼 한 통이랑 우유 500ml짜리를 하나 산다. 밤에 먹을지 아침에 먹을지 알 수는 없다.
다시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딱 필요한 것만 걸치고 침대에 널브러져 아까 하던 짓을 또 한다. 하필 이번 휴가에는 책도 한 권 안 들고 왔네. 10시가 조금 지났나, 남편에게 영상통화가 걸려온다. 1호는 엄마랑 헤어지고 집에 들어갈 때까지 울었다고 한다. 엄마 언제 와, 내일 아침에 나 깨기 전에 와, 나도 엄마한테 갈래, 엄마 보고 싶어, 엄마 사랑해…. 다른 공간에 있다는 것이, 화면으로 만난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11시쯤 되었나. 다시 좀 출출하다. 음식을 부려 놓았던 테이블을 끌어당겨 김떡순을 다시 입에 넣는다. 식어도 맛있네 하며. 아, 또 먹고 싶다. 양치는 하고 자야지 싶어 칫솔을 꺼내 이를 닦고 다시 침대에 널브러진다. 이제 일어날 일이 진짜 없다. 지난밤에도 늦게 자서 좀 피곤한데 왠지 그냥 자려니 아깝고 그렇다고 할 것이 있지도 않다. 나가서 밤바다를 좀 거닐어볼까 했지만 귀찮다. 지난번에 해봤는데 별 거 없더라.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가, 치대는 애들이 없어서 그런가,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꺼놓지 않은 알람이 운다. 에이씨. 다시 설피 잠이 들고 이제는 일어나야겠지 싶어 눈을 떠 시계를 본다. 10시다. 에이씨. 한 시간밖에 안 남았네. 바스락거리는 이불에 몸을 이리저리 비비적거리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다시 TV를 켠다. 아침 방송은 참 변하는 것이 없구나 하며 시리얼을 따서 우유를 붓는다. 몇 술 뜨다가 창가에 있는 소파에 누운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닌 채로 기대어 창밖을 본다. 비가 온다. 세상이 축축이 젖어있다. 우산도 없는데. 지난번에도 비가 오더니만. 우산을 또 사야 하나. 나갈 때는 비가 그치면 좋겠다. 근데 나가면 어디 가지. 집에는 가기 싫은데. 월요일이라 내가 좋아하는 서점도 쉬는 날이네. 차도 없으니 어디 가기도 불편하네. 점심은 뭘 먹지. 집에는 몇 시쯤 가지. 나 왜 이러고 있지. 진짜 집 밖에 모르는 아줌마가 된 건가. 아니야 아니야 손 세수를 하고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한다. 다음번에는 필히 2만 원 더 주고 24시간 스테이를 해야지 하고 중얼거린다.
10시 59분 체크아웃. 1분 정도는 낭비할 수 있지. 뜨끈한 곳에 있다 나와서 그런지 바깥바람이 시원하다. 지하철을 한 번 타볼까. 비가 더 쏟아질까 발걸음을 재촉해서 지하철역으로 간다. 지하철도 진짜 오랜만이네. 비 오는 날이면 지하철역에서 나는 꿉꿉한 냄새가 난다. 날이 맑으면 좋았겠지만 어쩌랴. 다음번에는 꼭 24시간 스테이를 해야지 하고 중얼거린다. 비도 피하고 밥도 먹고, 책도 하나 살 작정으로 백화점에를 간다. 뭐야. 이 서점 이 백화점에서 나가려는 건가. 서가가 훌빈하다. 괜히 이런 데서 돈 쓰기 싫다는 마음이 올라온다. 뭔 소리야. 다시 나와 지하철을 타고 집 근처 시장 앞에 내린다. 배가 고프다. 사람이 없는 식당을 찾아 들어가 밥을 시킨다. 밥이 먹고 싶었다. 난 시간이 많으니까 느릿느릿 밥을 먹고, 버스를 타고 집 앞으로 온다. 하필 버스 정류장은 우리 집 바로 앞에 있다. 순간 집으로 빨려 들어갈 뻔했다. 신속히 발걸음을 돌려 집 앞에 있는 큰 중고서점에를 들어갔다. 비 오는 월요일 낮이라 한산하다 못해 스산하다. 책을 한 권 사고 옆에 있는 카페로 간다. 직원이 1시간 머물 수 있다고 말한다. 제기랄. 24시간 스테이를 하는 건데. 다음번에는 반드시 24시간 스테이를 할 거야. 버텨봐야지. 쫓아내기야 하겠어. 커피 한 잔 시키고 1시간이 지나자 마음이 불편하다. 날도 스산한데 높다란 천정에 큰 공간이 춥다. 의자마저 너무 딱딱하고 차갑고 엉덩이를 찌른다. 아씨, 24시간…. 이제는 진짜 어쩔 수 없다. 집에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