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삐삐삐 다섯 개의 버튼을 순서대로 누르고 현관을 열었다. 조심히 들어가 잠시 현관에 서서 거실을 보았다. 기분이 좀 묘하다. 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를 보는 쪽에 있었는데 반대쪽에 서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거실의 불빛이 원래 이런 색이었나. 방에 있던 아이들이 “엄만가?”하며 뛰어나왔다. 2호는 한 번 웃더니 다시 방으로 가서 제 할 일이고, 1호는 왜 이제 왔냐며 품에 안겼다. 남편도 뒤따라 나와 잘 쉬다 왔냐며 웃으며 반긴다. 그렇게 23시간짜리 휴가가 끝이 났다.
집은 휴식과 안식과 사랑이 넘치는 곳이기는 하지만 나에게 늘 숙제를, 매일같이 똑같은 숙제를 내주는 곳이기도 하다. 아침 먹고 돌아서면 점심은 뭐 먹지, 저녁은 또 뭘 하나, 애들 집에 오면 씻기고 이런저런 것들 챙기고, 재우고 나면 내일 아침엔 뭘 먹여서 보내지 하는 끝없는 숙제들. 휴가를 가면 그 모든 숙제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 그다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챙길 거라곤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내 몸뚱이 하나뿐이다. 주말도 연휴도 없이 매일같이 힘든 숙제를 내주던 선생님이 “오늘은 숙제 없다.”하고 한마디 쓱 던지고 나갈 때의 기분과 그 홀가분함이란.
결혼 후 여러 번의 휴가를 보냈다. 휴가를 가겠다고 말할 때는 진짜 휴식이 필요하다는 간절한 마음에서다. 몸도 마음도 쉬고 싶다는 그 마음 하나. 자꾸 하다 보니 처음과 같은 그런 격렬한 설렘이나 계획 같은 건 없다. 밤에 잠이 금방 안 들면 ‘지척에 집 놔두고 이 짓을 왜 하고 있나, 애들 울려가며 이게 할 짓인가, 이제 그만할까’ 하며 결국 나를 또 죄인으로 만드는 물음표들이 떠오른다. 그러다 혼자서 바스락거리는 이불을 몸에 둘둘 감고 뒷일 생각 없는 순간을 느끼며 그래도 잘했다 다독인다.
집에 돌아와 잠들기 전 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1호 : 엄마, 휴가는 어땠어?
나 : 잘 쉬다가 왔어. 괜찮았어. 근데 여름아, 집에 올 때까지 울었다면서? 뭘 그렇게 우노?
엄마 하루만 자면 올 건데. 다음번에도 그렇게 울 거야?
1호 : 다음번? 휴가 또 가?
나 : 응. 또 갈 수도 있지.
1호 : 안 돼. 이제 휴가 절대 안 돼!
나 : 여름아, 엄마는 휴가를 왜 가는 걸까?
1호 : 음... 나랑 이든이가 엄마 힘들게 해서..
나 : 엄마는 뭐가 그렇게 힘든 것 같아 보여?
1호 : 엄마 집안일하는데 나랑 이든이가 자꾸 놀아줘 하고 밥도 잘 안 먹고 이런 거.
나 : 여름아, 엄마가 휴가 가서 곰곰이 생각을 좀 해봤거든.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요즘 여름이랑 이든이가 집에 있는 날이 많잖아. 엄마가 여름이랑 이든이랑 늘 재밌게 같이 놀고,
맛있는 것도 많이 많이 만들어 주고 싶어.
더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데 그게 엄마 마음대로 잘 안 되더라고.
그래서 엄마가 엄마한테 화가 났던 것 같아. 또 엄마는 집에서 해야 할 일도 있고,
엄마도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니까 화가 나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
어떻게 하면 화내고 짜증 내지 않고 말할 수 있을지 엄마도 고민하고 노력해볼게.
1호 : 응. 나도 엄마를 이해하도록 노력해볼게.
그런데 엄마, 잘 때 있잖아, 내가 발로 엄마 막 후벼 파고 엄마한테 자꾸 딱 달라붙는 거는
내가 그때는 눈을 감고 있어서 나도 모르는 거잖아? 그건 엄마가 좀 이해해 주면 안 될까?
나 : 그래. 알겠어. 근데 엄마가 비밀 한 가지 알려줄까?
1호 : 응. 뭐야 뭐야?
나 : 엄마도 어릴 때 외할매랑 같이 잘 때 발로 엄청 후벼 팠어. 그래서 할매가 엄청 엄청 싫어했다.
1호 : 지인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사이 하품을 연신하더니 아이는 잠깐의 정적 틈으로 쎄액쎄액 긴 숨소리를 낸다.
분명히 나는 또 휴가를 갈 것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또 가게 될 것이다. 자꾸자꾸 가다보면 외로울 것 같다. 그 언젠가는 남편과 같이 가고 싶다. 아이들은 잠시 잊고 남편과 둘이 휴가를 떠나고 싶다. 신혼여행을 둘이서 떠났듯이 또 그렇게 둘이서 떠나고 싶다. 그렇게 가면 좀 덜 외롭고, 좀 덜 심심하고, 밤에 좀 쉬이 잠들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