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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ynaree Feb 18. 2021

타이밍

잘 먹고 사는 데에도 부지런이 필요해

놀다가 스마트폰을 물에 빠뜨렸다.

나는 일관성 있게 덜렁대고 꾸준하게 허술하다. 결론 말하자면, 그동안 써둔 글들과 곡 작업 스케치들을 다 날렸다. 조금만 빨리 서비스센터를 찾아갔더라면 괜찮았을 거라던데. 게에 매여있는 한, 정기휴일이 되기 전에 시내에 나가는 일은 도무지 꿈만 같다.

공식서비스센터에서는 포기했고 사설업체에서 최소 30만원 이상의 돈을 지불해야만 복구할 수 있다는 데이터들은, 곰곰이 생각해봐도 그만큼의 가치는 없는 것 같다. 결국 포기.


제주로 이주하면서 단독주택 얻은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나의 텃밭'을 일구고 싶다는 것이었다. 올해는 욕심을 버리고 조금만 심었는데, 6월 초에 갑자기 허리를 다친 데다가 드문드문 계속 비를 뿌리는 긴 장마 탓에 텃밭을 중도 포기하고 말았다. 웃자라는 쌈채들을 보며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새벽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퇴근하면 기진맥진하게 되는 성수기엔 내 몸 하나 씻고 먹이는 것도 벅차니, 텃밭까지 잘 일구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어쩌지 못하고 손을 놓아버린 텃밭은, 슬프게도 이미 정글이 되었다. 


결국 많은 것들은 타이밍의 문제다.


여름이 선사하는 찬란한 곳간

여름의 에서는 채소들이 미처 다 먹어치울 수 없을 만큼 빠르고 풍성하게 자란다. 청상추, 적상추, 청치커리, 적치커리, 깻잎, 오이고추, 청양고추, 방울토마토, 애플민트, 페퍼민트, 바질, 로즈마리, 샐러...(이건 올해 나의 텃밭에 있는 것들만이다. 그 전에는 큰 토마토, 쪽파, 대파, 감자, 콩, 쑥갓, 고수, 아욱, 옥수수, 호박까지 심어제꼈다)

정해진 규격의 비닐 껍질에 맞춰 빡빡하고 반듯하게 자란 마트 진열대의 애호박들을 보면 늘 이상하게 마음이 참 안 좋다. 못생기고 울퉁불퉁한 열매들이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러운지는, 그것들을 키워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하루가 다르게 팔을 벌리고 키를 올리는 푸른 것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뭉클하고 이상한 책임감과 겸손함을 갖게 된다. 그러니 제 때 수확해서 부지런히 잘 먹는 것이 소박하고 깨끗한 이 아이들에 대한 제일 큰 감사가 아닐까.

엄마의 텃밭. 꼬부라진 오이라도 맛은 좋다.
엄마의 텃밭. 여름텃밭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호박.
엄마의 텃밭. 매년 이 고추들이 김장용 고추가루가 된다.

초등학교 시절엔 여름방학마다 남해에 있는 외갓집에 갔었다. 여름 하면 떠오르는 가장 강렬한 기억 중 하나는, 밭에서 소담스럽게 익어가던 가지를 툭, 따서 쓱쓱 닦은 후에 와작 베어 물어먹었던 장면이다.


직도 그 모든 풍경이 생생하다. 죽 늘어서 있던 밭이랑과 이글거리던 햇살. 지금의 나보다 어린 . 지금의 엄마보다 어린, 그러니까 환갑을 넘 지 얼마 되지 않은 외할머니. 반들반들 검보랏빛 가지 열매 같은 그 모든 것들이.

엄마 텃밭

엄마에게도 텃밭이 있다.

태어나 줄곧 남해에서 살았여인은 결혼과 동시에 낯선 서울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인한 몇 년의 지방살이를 제외하고는 일생의 3분의 2 이상을 서울에서 보낸 셈이다. 몇 년 전 경기도 여주로 전원주택지어 이사를 하자마자 부모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뒷마당에 아궁이를 만들고 밭을 갈고 뭔가를 심고 걷고 덖기 시작하셨다. 날이 추워지면 거실은 그야말로 온실이 된다. 덕분에 사철 싱싱한 파와 고수와 허브를 먹을 수 있다.

엄마의 텃밭. 마당에 심어놓은 대파.
엄마의 텃밭. 방풍과 당귀.
엄마의 텃밭. 힘차게 뻗은 가지와 호박 덩굴.
엄마의 텃밭. 블루베리.


타이밍


마트폰은 전원을 끄고, 드라이어로 말리고, 통에 박아두었으면 괜찮을 수 있었을까. 물론 그렇게 했다. '곧바로' 신속하게 하지 못했을 뿐이다. 여름 텃밭은 잠시 며칠만 소홀해도 미친 듯이 풀이 자라 올라온다. 주객이 바뀌는 건 시간문제다. 제철 채소와 과일을 길러먹는 건 그래서 쉽지 않다. 짬을 많이 내야 하고, 지런을 떨어야 하일이다.


사랑도, 연애도 그렇다.

모든 신경과 에너지를 집중해서 적당한 고백의 타이밍을 잡아채는 것. 그렇게 시작된 연애에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들여 소통을 일궈가는 것.


돌이켜보면 나는 한 번도 그러지 못했다.

정말 좋아했던 첫사랑에게 고백조차 하지 못했고, 그에게서 다시 어떤 신호가 있었을 땐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썸이 썸인 줄 모르고 지나친 시간들을 떠올리면 내 발등이라도 찍고 싶은 심정이다. 연애를 할 땐 무신경하거나 이기적일 때가 많았고, 긴 호흡으로 관계를 바라보지 못했다.

나는 늘 너무 훅 들어가거나 철벽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기회를 놓쳤고, 흘려보냈고, 잡지 못했다. 나는, 연애의 타이밍이라는 면에서 대실패 한 인생이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연애 이야기 따위는 접어두고  내가 미처 못 먹은 여름음식이 뭔지 생각해본다.

극성수기가 지나가고 있으니 여행자들이 조금 뜸해진 바닷가에서 치맥이나 해볼까. 수박은 어제 동네 소상공인 동들과 나눠 먹었으니, 조만간 다시 모여 해초 냉국에 콩전을 부쳐서 제주막걸리나 한 잔 하고 싶다. 아, 제주 한치의 끝을 잡고 물회를 실컷 먹어두는 것도 좋겠다.


아무튼 요지는 건강 여름채소와 제철 식재료로 만든 신선한 음식을 많이 먹자는 것. 먹고사는 데에도 타이밍은 중요하다. 기운이 있어야 연애도 하지요, 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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