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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ynaree Feb 18. 2021

멸치의 미덕

멸치 앞에서 겸허함을 생각한다

멸치를 좋아한다.

싱싱한 남해산 마른 멸치는 냉동실에 늘 떨어지지 않게 채워둔다. 북어포와 더불어 최고로 애정하는 안주이기도 하다. 고추장에 찍어먹으면 맛은 있지만 나트륨 섭취가 과해지고 맥주의 흡입에 가속 붙는다는 점에서 조금 위험하다. 대신 프라이팬에 올려 약불에 잘 저어주면서 수분을 날려 바삭하게 만들어 먹는다. 급한 마음에 화력을 올리거나 한눈을 팔면 타버리기 십상이라 의외로 정성을 필요로 한다. 작은 밀폐용기에 담아 가지고 다니면서 입이 심심할 때 집어먹기도 하는데, 혹 따라 하실 분이 있다면 무난한 사회생활을 위해 가글액을 꼭 함께 챙겨 다니기를 권한다.


밑반찬으로도 멸치만 한 것이 없다. 잔멸치는 견과류와 함께 다글다글 볶아먹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엄마표 고추장 멸치볶음이다. 어지간한 요리에서는 엄마의 레시피를 흉내라도 내는데, 이놈의 멸치볶음만큼은 아무리 해도 딱 떨어지는 엄마의 손맛이 안 난다.

엄마의 레시피는 이러하다.


1. 일단 들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다진 마늘과 함께 멸치를 볶는다. 미리 수분을 날려 바삭하게 만들라는 레시피도 본 적이 있는데, 너무 수분이 빠지면 식었을 때 양념과 함께 굳어져서 이 과정은 생략하는 편이다. 제일 중요한 것이 불 조절이다. 불이 세면 멸치가 타고, 불이 약하면 멸치가 기름을 너무 많이 먹어 눅져진다. 들기름이 타면 특유의 좋지 않은 냄새가 나기 때문에 적당한 온도에서 볶는 것이 관건이다. 원래 엄마들의 레시피에 정확한 조리시간과 계량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충분한' 기름에 '적당히' 잘 볶아야 한다.


2. 멸치 어느 정도 기름이 배어들었다 싶으면 재빠르게 불을 끈다. 불을 끄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고추장과 매실액, 올리고당(혹은 물엿)을 넣고 남은 열을 이용해 빠르게 뒤적다. 장이 너무 많으면 짜질 뿐 아니라 양념이 뭉치기 쉬우니 멸치들이 포슬포슬하되 살짝 끈적일 정도로만 넣는다. 마지막에 깨소금을 솔솔 뿌리면 끝.

맨밥을 물에 말아도 엄마표 멸치볶음만 있으면 꿀맛이다. 안주로는 더할 나위 없고, 캠핑이나 해외여행에도 챙겨가는 밑반찬이다.

뭐니 뭐니 해도 멸치육수를 빼놓고는 멸치를 얘기할 수가 없다. 진하게 끓인 멸치육수에 호박과 양파를 적당히 채 썰어 넣고 양념을  간간한 잔치국수는 정말 맘 같아선 한 대야쯤 먹을 수 있다.
디포리나 황태를 더해 진하게 만드는 육수도 좋지만, 멸치만을 정직하게 우려낸 육수의 뚝심 같은 것이 종종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후루룩, 멸치 된장찌개를 끓인다.

3-4인분 기준하여 작은 냄비 기준으로 다시 멸치를 한 주먹 정도 넣고 끓인다. 렇게 하게 끓인 멸치육수에 다시마를 넣어 우려내고, 다시마와 멸치 싹 건져낸 후에 된장을 넉넉하게 풀어 다시 불에 올린다.
여기에 다진 마늘과 양파, 호박, 두부를 넣고 한소끔 끓으면 대파와 매운 고추를 썰어 넣는다. 국물을 진하게 내는 찌개라 전분이 우러나는 감자 넣지 않는다.

여기에 누룽지와 열무김치를 더한다면 그보다 더 환상적인 조합은 없다. 건더기 가득한 걸쭉한 찌개 구수한 누룽지와 아삭한 열무의 시원함이 더해지면 정말 어떤 고기반찬이나 수라상도 부럽지 않다.




어어 하는 사이에 여름이 저만치 줄달음쳐 버렸다. 그토록 뜨겁고 끈적이더니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힘들다 지겹다 툴툴댔으면서도 막상 아쉬워져서, 여름을 보낼 때는 늘 미안함과 멋쩍음이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하고 얄팍한지 깨닫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와 자연함 앞에서 일관되게 공손해지기란 참 어렵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뼈와 살과 내장을 모두 아낌없이 내어주는 멸치를 보고 있노라니, 나는 뭔가 '멸치 똥만큼도' 겸허하지 못한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성큼성큼 오는 이 가을에는 좀 수더분한 마음으로 지내보고 싶다. 허풍이나 엄살, 기름진 언어들을 걸러내고 묵묵하고 성실하게. 멸치육수 같은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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