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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ynaree Feb 18. 2021

오늘도 꽃을 품고 달콤해지는 중이라네

꽃을 품은 마음이란 게 있다면

무화과는 꽃이 없이 열매를 맺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실제 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꽃받침이 비대해져 항아리처럼 둥글게 커지면서 우리가 보는 열매가 되는 것인데, 그 열매 속에 숨어 있어서 씨라고 생각하기 쉬운 작고 하얀 것들이 바로 꽃이다.

부산 큰 이모 댁 마당에는 무화과나무가 있었는데, 어린 시절 어느 해 여름방학 때 사촌오빠들과 담장 위에 올라가서 무화과를 따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게 아마도 내겐 첫 무화과 경험이었던 것 같은데 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 걸 보면, 그 말랑하고 오독오독 씹히던 과육과 단맛이 꽤 인상적이었나 보다.

보름 간격으로 제주를 휩쓸고 지나간 두 차례의 태풍 탓에 뒷마당의 무화과나무 세 그루는 민망할 만큼 앙상해져 버렸다. 익는 족족 온갖 새들이 쪼아 먹어서 애초부터 내 몫이 넉넉했던 것도 아닌데, 태풍에 떨어진 열매와 잎사귀가 온통 마당에 나뒹구는 걸 보니 어찌나 속이 쓰리던지.

그렇다고 안 먹을 수는 없지. 마침 볼일이 있어 시내에 나간 김에 대형마트에 들러 무화과를 한 팩 샀다. 집에서 만든 플레인 요구르트에 잼이나 마멀레이드를 섞어 먹으면 사 먹는 제품보다 훨씬 덜 달아서 좋다. 담백한 빵에 얇게 펴 발라 먹어도 좋다.

그래. 이번에는 무화과 잼을 만들자.




이래 봬도 제주에 사는지라, 흔한 게 귤 잼이나 청귤 잼이다. 게다가 엄마가 사과 마멀레이드나 복숭아잼 혹은 과일통조림을 만들어 시기적절하게 구호물자처럼 내려보내 주시니 얼마나 좋은지.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그 풍성한 먹거리들을 머리를 조아리며 열심히 먹는 뿐이다.


설탕


보통 잼을 만들 때는 색감을 위해 흰 설탕을 쓰는 게 일반적이다. 나는 단맛을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 정백당보다는 자일로스 설탕을 주로 쓴다. 단풍나무나 자작나무에서 추출한 자일로스 성분이 들어있는 자일로스 설탕은 일반 설탕보다 당도가 낮다. 짙은 색이나 원당 자체의 풍미를 원한다면 황설탕을 사용할 수 있다. 자일로스 설탕에도 황설탕이 있다. 아기나 어린이들이 먹을 거라면 유기농 설탕을 사용해도 좋을 듯하다.

설탕은 대개 재료가 되는 과일과 같은 무게의 비율로 넣는데, 과일 자체의 당도가 높거나 오래 보관하지 않고 금방 먹을 거라면 설탕을 조금 더 줄여도 된다.
나는 자일로스 설탕이라는 핑계로 1:1 비율로 넣었다. 무화과 한 팩이 대략 700그램 정도라, 설탕도 그만큼을 저울에 달아 준비해두었다.


저장용기


장아찌며 오일에 절인 치즈, 앤초비, 올리브 등을 좋아하고 많이 먹는지라 보르미올리 유리병은 크기별로 구비해두는 편이다.
오목한 팬에 물을 담고 유리병을 엎어 불을 켠다. 끓는 물에 병을 소독한 뒤에 꺼내서, 깨끗하게 삶아 말린 행주 위에 엎어 물기를 빼둔다. 병뚜껑도 같은 방법으로 소독한다.


잼 만들기


다른 과일에 비해 무화과는 손질이 쉽다. 복숭아처럼 단단한 씨도 없고 사과처럼 껍질을 벗길 일도 없으며, 물렁하기 때문에 그다지 잘게 잘라둘 필요도 없다. 쉽게 뭉근해져서 잼을 졸이는 시간도 훨씬 짧은 편이다.
무화과는 엉덩이 꼬리(!) 부분에 물이 들어가지 않게 꼭지를 잡고 깨끗이 씻는다. 물기를 빼고 잘 닦은 후 4분의 1 정도의 크기로 숭덩숭덩 잘라 잼팟이나 궁중팬에 담는다.

잼을 만드는 건 팔 할이 팔근육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팔근육을 실질적으로 가동하는 인내심이다. 퍽퍽 튀어 오르는 잼 방울에 데지 않게 조심하며 불을 세심하게 조절하는 건 기본.
자, 이제 준비가 되었다면 무화과에 설탕을 붓고 불을 켠다.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눌어붙지 않을 정도로 불을 줄이고, 주걱으로 젓는다. 젓고 또 젓는다. 끝없이 저어야 한다. 자신과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 자신이 없다면 무화과를 처음부터 잘게 다져 넣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는 '왕건'의 식감을 포기할 수 없으므로 과육을 잘게 썰어 넣는 대신 꾸역꾸역 젓고 또 젓는다.

거의 완성된 무화과 잼

다 식고 나면 조금 더 굳어진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원하는 농도가 될 때까지 불을 줄여가며 졸인다. 나는 냉장고 사용 공간을 줄이기 위해 좀 오래 졸여 진하게 만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주방으로 달려가 밤새 식혀둔 잼부터 확인했다. 세상에나, 무화과에 설탕만 넣고 끓였을 뿐인데 계피나 생강을 넣은 것처럼 향긋하고 상큼하다. 그래, 너는 꽃을 품고 있었지. 아니, 처음부터 꽃이었어. 근사하고 진한 무화과잼이 한가득 만들어졌다. 갑자기 따뜻한 버터롤과 커피 한 잔이 간절해진다.




요 며칠 동안 지겹게도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월정 바다에도 따사롭고 쨍한 가을 햇살이 가득하다. 무심한 듯 조금씩 조금씩 옮겨가는 계절 속에서 나는 오늘도 이렇게 잼을 만들어 다가올 계절을 준비하고, 뒤늦은 뜨거움을 갈무리한다. 다음 주에 또 한 번 지나갈 거라는 태풍은 여태 용하게 버텨준 무화과 열매들을 새들의 몫으로 좀 더 오래 남겨둬 주면 좋겠다.

월정곰닭 맞은편 포구

한가한 틈을 타 가게 창가 자리에 앉아, 따뜻하게 구운 빵에 꽃을 품었던 무화과로 만든 잼을 발라 먹으며 문득 생각해본다.

꽃을 품은 마음이란 게 있다면 그건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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