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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ynaree Feb 18. 2021

수프의 미학

건강하게 넉넉하게 단출하게

초가을 내내 머리 복잡 몇 가지 일들에 시달리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어 요리도 글쓰기도 음악 듣는 일도 저만치 미뤄두었었다. 어느새 날은 점점 차가워져 겨울이 코앞이다. 여행객들은 드물어지고 이 곳 제주의 바닷가에도 한산한 기운이 돌기 시작다.

이맘때 꼭 해 먹는 요리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야채수프다. 이탈리아에서 유래된 '미네스트로네'와 거의 흡사하다. 수프 하면 경양식집에서 식전에 나오는 크림수프 정도떠올리던 내가 수프의 세계에 눈을 뜬 건,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이 쓴 책 <조화로운 삶>을 읽은 20대 초반이었다.

아침엔 과일, 점심엔 수프와 곡식, 저녁엔 샐러드와 야채를 먹으며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자급자족하는 삶. 4시간 노동하고 4시간의 자유시간과 여가를 갖는 삶. 사회활동과 독서, 글쓰기, 작곡 등의 취미를 유지하고 하루 일과에 규칙적으로 포함시키는 삶.


서울을 떠나 제주에 와 살고 있는 지금조차 그들의 삶의 방식을 1%나 실현하고 있으려나. 다만 책에 담긴 두 사람의 태도와 가치관이 내게 상당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그날그날 남은 자투 야채들을 큰 냄비에 넣고 부엌의 장작불 위에 걸어 꺼져가는 장작불에 밤새도록 은근하게 끓여진 근사한 수프가 다음날 아침에 준비되어 있다는 대목을 읽을 때얼마나 설레던지.

그렇게 <조화로운 삶>에 나온 대로 무작정 만들어보기 시작한 수프는 날카롭고 피폐했던 대학원 논문학기를 버티게 해 준 고마운 양식이었고, 으슬으슬한 환절기에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치유의 음식이 되었다.


얼마 전, 섬유질이 풍부하고 소화가 잘되는 따뜻한 음식이 뭘까 고민하는 엄마에게 야채수프를 끓여드리기로 했다. 사실 만드는 방법은 정말 쉽고 간단하다. 취향에 따라 적당한 야채들을 선택하고, 잘라서, 넣는다. 그뿐이다.

크기가 넉넉한 냄비에 올리브오일을 충분히 두르고 슬라이스 한 마늘을 끓인다. 마늘기름이 우러나면 야채들을 단단한 순서대로 차례차례 넣는다.
당근은 새끼손가락 마디의 절반 정도 되는 크기로 다이스 컷 하면 부서지지 않되 식감을 유지할 수 있다.
토마토는 단단한 재료들을 넣는 중간에 넣어주면 적당히 육수가 배어나오면서 물을 첨가하지 않아도 된다. 야채들을 볶으면서 토마토는 자연스럽게 으깨진다.

토마토는 반드시 끓는 물에 데쳐서 껍질을 벗겨 사용한다. 껍질이 남아 떠다니면 보기에도 좋지 않을뿐더러, 먹을 때 질긴 껍질이 매우 거슬린다. 시간이 부족하거나 귀찮다면 시중에 판매하는 홀토마토 통조림을 사용해도 된다.

크기가 큰 토마토는 적당히 숭덩숭덩 잘라 넣으면 되지만, 이번에는 여름에 잔뜩 만들어 저장해 둔 저수분 방울토마토를 사용했다. 방울토마토라 크기가 적당해서 따로 자르거나 으깨지 않아도 되었다.

감자는 당근보다 조금 크게 써는 게 좋다. 납작하게 썰기보다는 조금 크게 다이스 컷 해야 부스러지지 않는다. 이 즈음에 양파를 넣어주면 육수가 늘어나 자작한 정도가 조절된다.
단호박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단호박 추가. 단호박은 감자보다 좀 크게 썰어야 모양이 유지된다.
'값싸고 흔한 재료나 남은 재료를 몽땅 넣어 끓여 만드는 미네스트로네 같은 수프는 가난한 농부들이 굶주린 배를 채우기에 적당한 음식이었다. 중세시대(476-1453)의 농노들은 세금이 부과되지 않던 곡물, 콩, 채소 등의 식재료에 의지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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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파스타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고,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쌀이 가난한 이들의 주식으로 보편화되면서 오늘날과 같이 수프에 파스타나 쌀을 넣어 걸쭉하게 먹는 미네스트로네의 형태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이탈리아에 들어온 토마토, 감자 등의 새로운 채소들이 조리에 사용된 것도 오늘날과 같은 미네스트로네의 레시피가 만들어지는 데 일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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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스트로네는 남은 재료를 모아 만든 재활용 요리라는 인식 탓에 '쿠치나 포베라(cucina povera, 농부, 서민들의 소박한 음식)'를 대표하는 메뉴로 분류되었다. 산업화의 물결이 일던 1900년대 초·중반만 해도 가난의 유산, 혹은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컴포트 푸드(comfort food)로만 인식되었으나, 1980년대에 이르러 건강식이라는 미네스트로네의 장점이 부각되면서 지중해식 식사(mediterranean diet)로서 새롭게 부각되었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토마토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오레가노를 듬뿍 넣어준다. 생 허브가 있으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드라이허브로도 충분히 훌륭한 풍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제 부드러운 재료들을 마저 넣어준다. 양배추를 듬뿍 넣으면 달큰한 맛이 진하게 우러나온다. 위장기능과 소화에 좋다는 양배추는 이런저런 방법으로 열심히 챙겨 먹는다.

양배추는 너무 크지 않게 자른다. 단단히 뭉쳐있는 안쪽 부분은 분리해서 넣어주는 게 좋다.
양송이도 납작하게 썰기보다는 부피감 있게 썰어주는 게 식감이 좋다. 의외로 부서지지 않으니 너무 크지 않게 자른다. 새송이버섯을 써도 좋다.
킬링포인트는 샐러리다. 잎과 줄기부분을 적당히 섞어 썰어 넣어준다.

샐러리를 넣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야채들에서 우러나온 진한 육수에 샐러리 특유의 향이 더해지면 풍미가 정말 끝내주는 수프가 만들어진다.

순서대로 야채를 다 넣은 후에는 불을 줄이고 뚜껑을 닫은 후에 눌러붙지 않도록 가끔 저어주면서 오래 끓인다.

마지막에 후추를 조금 갈아 넣고, 소금으로 기호에 맞게 간을 맞춘다. 국물을 떠먹는 것을 좋아한다면 마지막에 물을 조금 더다.

다진 견과류와 파슬리를 뿌려 먹는다.

보통은 견과류를 뿌려먹는다. 아몬드, 캐슈너트, 호두 같은 견과류들을 약한 불에 살짝 구워 다진 후에 뿌려먹으면 부드러운 수프에 오독오독한 식감이 더해져 재미있다. 때때로 크루통이나 시리얼을 끼얹거나, 바게트를 찍어먹기도 한다.


전통적인 미네스트로네 레시피를 보면 콩이나 곡물을 함께 끓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호랑이 콩이나 병아리콩, 렌틸콩도 좋고, 율무나 보리, 귀리 같은 곡물도 좋다. 구운 곡물이 있다면 마지막에 뿌려먹어다.


챙겨 먹는 것은 꽤 품이 드는 일이고,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수프는 그 대안 중 하나다. 시간과 불이 완성하는 건강한 요리. 나는 그저, 조금 거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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