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분노에 묻는다

불면의 밤이 내게 준 것에 대하여.

by 나리다

"너랑 상관도 없는 일에 왜 그렇게 화가 났어?"


말문이 막혔다.

친구에게 오늘 부서에서 있었던 다툼에 대해 이야기하던 참이었다. 그 작은 분쟁은 나와 그다지 관련이 없어 내게 직접적으로 해 될 것이 없었다. 그저 무시하는 정도면 충분했다. 그런데도 나는 불필요하게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어쩌면 지레 겁을 집어먹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평소에 할 말을 다 하지 못한 채 당하는 편이었으므로, 이번에도 내가 무언가를 당할 것만 같은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들 중 제일 자신감 없고 확신이 없는 사람이 나였는가 보다. 만만했을지도. 그리고 내가 만만해 보이는 사람이라는 게 화가 났을지도.

어쩌면 졸렸던 것 같기도 하다.

무거운 졸음이 눈썹을 지그시 눌러왔다.


지난밤엔 아무리 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는 주로 잠이 오기 직전에 유튜브로 옛날이야기를 틀어놓는다. 요즘엔 어사 박문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본다. 나긋나긋한 여자의 음성이 나를 아주 먼 옛날로 이끌고, 정신없이 그 음성에 끌려들어 가다가 어느샌가 잠이 들곤 한다. 그런데 어제는, 딱히 내용에 집중했던 것도 아닌데 어쩐지 머릿속이 점점 맑아졌다.


불현듯 낮부터 이어진 업무 고민이 뇌리로 돌진하는 바람에 핸드폰을 들어 업무 관련 카페에 접속한다. 홀린 듯이 필요한 내용을 찾아보다 보니 시간이 꽤 많이 지나 있었다.


다시 유튜브를 켠다. 조금 필사적인 마음으로 어느 마술사의 마술최면 영상을 틀었다. 마술사는 신뢰가 가는 목소리로 자기를 믿어야만 한다고 거듭 말한다. 아주 푹신한 침대 속으로 빠져드는 상상을 해 본다. 온몸에 힘을 빼고 해파리가 되어 우주 한가운데를 유영한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잠을 잘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다시 정신이 또렷해 온다.

실패다.


잠자리를 옮기면 어떨까, 거실로 나가 소파에 눕는다.

새벽 다섯 시다.

커튼 사이로 창밖이 어슴푸레하다.

남은 시간은 두 시간. 그냥 날을 새워버릴까, 잠이 들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는데, 눈을 뜨니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 사이 몇 번인가 꿈을 꾸었다.

혀로 몇 번 아랫니를 밀어냈는데 왠지 이가 부러져서 택시를 타고 치과를 향하는 꿈이었던 것 같다. 눈앞으로 커다란 거미가 지나간 것 같기도 하다. 거미는 처음엔 아주 작아 한 손에 잡힐 만큼이다가, 놓치는 순간마다 조금씩 커졌다. 나는 그 거미를 잡았던가, 놓쳤던가.


그렇게 일어나 출근했으니 화가 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래서 오늘은 일찍 자야 한다.

벌써 밤 열두 시가 넘었지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