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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리다 May 02. 2024

그따위 기적, 그따위 희망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고. (스포 있음)

'우리들의 블루스'를 봤다. 나는 매번 유행에 뒤처진다. 꽤 인기드라마였는데 종영된 지 몇 년이 지나고야 다.


춘희할망의 아들이 트럭 사고로 정신을 잃고 한 달을 깨어나지 못하는 에피소드를 보고 있는데 곤히 잠자리에 들어있던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쟤는 맨날 클라이맥스에 저래. 거실에서 친정엄마와 드라마를 보던 나는 짐짓 투덜대며 안으로 들어가 내 품을 파고드는 애를 끌어안고,

숨죽여 울었다. 친정엄마랑 같이 보느라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던 것이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를 끌어안고 달래는 새 북받쳐 올라왔다. 아이는 그만 울고 싶어,라고 말하면서도 삼십 분을 내리 울었다. 만 세 살, 다섯 살이나 됐는데 가끔 그리 운다. 정상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자다 깨서 울음을 안 그치는 애를 달래며 안고 있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얘 갓난 애일 때 편이랑 사별하는 바람에 끄떡하면 애를 안고 울고 나자빠져서 그 기억이 남아 가끔 경기를 하는 건 아닐까 하고.

아니면 그날 그때처럼 당신이, 내가 드라마 같은 걸 보면서 힘들어하는 걸 눈치채고 애 발뒤꿈치라도 꼬집 걸까.


나는 춘희할망의 아들이 살았나 죽었나 궁금했고, 그리고 또 알고 싶지 않았다.

성난 바다에 고깃배 띄워 비친 등불 백 개에 소원을 비는 것 따위로 기적을 이루다니. 창가에 둥근달이 뜰 때마다 우리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던 내 기도는 욕심스럽고 간절함이 부족한 까닭으로 기적이 찾아오지 않았던가. 아니면 내 인생엔 그 정도의 기적이 최선이었던가.


그래, 춘희할망 아들이 그렇게 죽으면 세상이 춘희할망에게 너무 가혹한 거지. 살아야지, 남편이고 다른 자식이고 다 일찌감치 죽었는데 그 아들이라도 살아야지.


남편이 실종된 지 수시간이 지나고 시어머니가 집에 오셨다. 그리고 아기 요람에 누운 손주와의 첫 만남에 첫마디로, 불쌍한 것 이걸 놔두고 어찌 죽었을까 했다. 나는 무너져 엎어졌다. 어머니 아직, 아직 그 사람 안 죽었어요. 

어머닌 애간장이 끊어져 아셨을까. 그 사람이 그리 된 것을.


우리 시어머닌 좋은 시어머니가 아니고 나는 좋은 며느리가 아니다.

어머닌 내 남편 장례를 치른 지 삼일 되던 날 내게, 너는 재혼할까 믿을 수 없으니 남편 사망으로 나오는 보상금을 당신에게 나누라 했다. 아이의 몫을 챙겨놓겠다 하셨다. 애 기저귀값이라도 주시면 돌려드릴 생각으로 할 말이 있다는 어머니를 쫓아 나온 나는 불시에 머리를 맞은 듯했다. 나는 곧바로 따져 물었다. 어머니 제가 재혼하면 애를 버려요? 애 몫은 제가 알아서 챙길게요.

아마도, 어머니 제가 무슨 재혼을 해요 저는 그 사람밖에 없어요, 이러지 않은 나여서 더 못 믿었을지도 모르나 이제와 그렇게까지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어머니는 그 사람이 있을 때에도 어머니 하고 싶은 대로 나를 상처 주셨고 그 사람이 없고 난 후엔 내가 그걸 참을 여력이 없었다.

어머니의 슬픔까지 끌어안기엔, 남편의 죽음은 나와 아이의 생계 걸린 일이었다. 리의 슬픔은 서로를 맞대 비빌수록 커져서 나는 나부터 살기로 했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에게 보상금을 나눴다. 그게 어머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편을 위한 일이어서 그렇게 했다. 생각지 않게 그 덕분으로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 없이 이제껏 다.


어머니가 좋은 분이라는 안다.

아마 어머닌 진짜 좋은 사람일 것이다. 그 자식들 진짜 좋은 사람이라서 알 수 있다.

어머니가 날더러 죽으라고 아무 말이나 하신 것도 아니고, 어머닌 그럴 수 있지. 그리고, 나도 이럴 수 있는 거지.

어머니한테 연락을 잘 안 한다. 아이 몫 챙긴다 하셔 놓고 행여나 내 삶에 그 돈이 쓰일까 봐 걱정인지 언제부턴가 애한테 아무것도 안 해주시는 어머니, 원망도 않고 연락도 안 한다. 

그냥 어쩌다 가끔 생각난다. 내 새끼 이쁜 짓에 깔깔 웃음 터질 때, 내 자식 손가락에 난 생채기 하나 애달플 때, 항상은 아니고 가끔 생각난다. 어머니가 불쌍해 미어진다. 나는 못돼서 후회는 안 할 것 같다. 그저 매 순간 아프고 그뿐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줄곧 변하지 않을 단단한 사람, 나는 더 고통받기 싫은 사람.

그래서 우리 관계가  모양이다.

언제고 애가 크고 나도 나이가 들어 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속이 너그러워지는 때가 오면 뭔가 달라질지도 모른단 생각 드는데 지금은 렇다.


춘희할망네 아들은 마침내 살았다.

내 남편의 죽음에 기적 따위 없었는데. 마음속 한구석에 비정상적인 분노가 치밀었다.


안다. 이 세상엔 기적이 필요하다. 나보다 더 기적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고, 세상 일이 그렇지 않거든 드라마에서라도 기적은 일어나야 한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것이다. 이루어지지 않아 때로는 잔인한 희망일지라도 어쨌든 그런 게 희망이다. 


어머니는 이 드라마를 보셨을까. 춘희할망의 아들이 살아난 게 기뻤을까 슬펐을까. 그냥 나는 아주 가끔 시어머니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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