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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리다 Mar 17. 2024

나의 시집살이

내 소중한 남편, 당신의 어머니가 나를 못살게 했다

결혼 생활 동안 나의 가장 큰 고난 시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일이었다. 나는 남편이 정말 좋았고 그래서 남편을 애써서 길러주신 어머니랑 잘 지내는 것까지가 내 의무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시어머니로부터 비롯되었는데두 사람은 정말 달랐다. 시어머니는 성품이 고 자식들도 힘껏 잘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였으나 좋은 시어머니라고 말할 순 없었다. 물론 나 또한 좋은 며느리가 아니었음을 반성한다. 무릇 좋은 며느리란 고분고분 참을 줄도 굽힐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인데 나는 도통 그걸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부딪쳤다. 그 사이에서 남편 또한 괴로웠을 것이다. 그는 입장차가 극명한 나와 어머니 가운데에서 혼란스러워했다. 평생 말 잘 듣는 아들이었을 그 사람은 나 때문에 자주 시어머니와 목소리를 높였고 시어머니는 그때마다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남편은 처음에는 그나마 말이 통할 것 같은 나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 시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세대차이였다. 삶이 달랐다. 시어머니가 나빠서도 내가 나빠서도 아니었다. 남편과 계속 살기 위해선 시어머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는데 시어머니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내 삶을 깎아내리는 일이었다.


시어머니는 당신의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강요했다. 시어머니한텐 그게 절대적으로 옳은 삶의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우리에겐, 우리가 뜻하는 삶의 방식이 있었다. 그중 어떤 것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내가 처음 시댁에서 자던 날, 방바닥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시어머니는 두꺼운 이불을 펴주었으나 냉기가 이불을 뚫고 올라왔다. 남편은 익숙한지 잘 잤다. 나는 자는 사람을 깨울 수 없어, 용기를 내어 거실로 나 보일러 온도를 올렸다. 그러자 거실에서 주무시던 시어머니가 무슨 일이냐 물으셨고 나는 솔직하게 추워서 잠이 안 온다고 했다. 어머니는 보일러 온도를 다시 내리고는 낡은 전기장판을 건네주었는데, 고장이라도 났는지 장판은 도무지 따뜻해지지가 않았다.

신혼 초 새댁이던 나는 차마 두 번이나 시어머니가 주무시는 거실에 나가 보일러 온도를 높일 용기가 나지 않아 추위에 떨며 겨우 잠이 들었다.


막 신혼살림을 하나 둘 장만하며 설레던 때, 어머니 늙은 호박처럼 크고 오래된 놋주전자를 주셨다. 정수기는 설치하지 말고 거기에 물을 끓여 먹으라고 신신당부하셨다. 놋주전자 안에는 식당에서 쓰다 버린 것 같은 인삼무늬 수저와 스테인리스 컵 등이 가득 들어있었다. 나는 그 놋주전자를 남편도 모르게 버리고는 며칠 뒤 집에 정수기를 설치했다.


어느 날은 내 신혼집에 이런저런 잡동사니와 함께 탄 자국이 완연한 나무 냄비받침을 갖고 오셨다. 나는 시어머니 몰래 그걸 다시 어머니 차에 숨겨놨다. 그 다음번에도 시어머니는 내게 살이 부러진 빨래건조대 등 필요 없는 물건을 잔뜩 갖다 주셨는데 그 사이엔 또다시 그 탄 자국 남은 냄비받침이 들어있었다.


시어머니가 가 있는데 가져가려냐고 물으시면 대부분 필요 없다고 대답했으나, 애초에 내 대답을 바라고 물으신 것도 아니었다. 내가 싫다고 해도 반드시 갖다주셨. 


것들은 사용은 가능하지만 어딘지 망가 물건들이었다. 거의 그랬다. 나는 어느 날부턴가 미칠 것 같았다. 뭐를 주신다고 해도 싫었는데 대놓고 말해도 무조건 주셨다. 시어머니도 내가 드리는 것들이 마음에 안 들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양가에 똑같 소형 전자제품을 사드렸는데 마뜩잖은 표정으로 가져가서 필요한 사람에게 주라 하셨다.

우리의 주고받음은 서로를 상처 입힐 뿐이었다.


근검절약이 삶의 지침이었던 시어머니는 어머니가 주는 것들을 한사코 받지 않으려는 나를 돈이 많다며 비꼬았다. 시아버지가 쌈짓돈을 꺼내 내 주머니에 넣어주시려 할 때면 쟤네 돈도 많은데 우리가 받아야지 뭣하러 주느냐며 타박했다. 친척 어른이 우리에게 밥을 사주신다고 하면 말렸다. 쟤네는 돈이 많으니 쟤네더러 계산하게 하라고 말했다. 나는 하마터면 계산할 뻔하였으나 내 손을 다정히 잡아 너희 어머니가 살아온 삶이 고달파서 그렇다 이해하라 달래주신 친척 어른의 면을 봐서 참았다.


내가 임신하자 시어머니는 무척 기뻐하며 한약을 지어준다 했다. 유산을 두어 번 한 터라 조심스러워 한약은 아이를 낳고 보신으로 먹겠다고 하자, 시어머니는 임신 중에 보약을 먹어야 애한테 좋은 기운이 가지 않느냐고 서운해했다. 결국 시어머니는 내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출산 후에도 기저귀 값, 분윳값 한번 준 일이 없었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자식 잃은 시어머니가 불쌍했.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절망이 지나쳐 담담한 어투로 '차라리 내가 대신 죽을 수 있다면 백번이라도 죽겠는데' 하셨다. 강한 고집과 뚝심으로 악착같이 살아온 세월이 으스러졌다. 그는 내 남편이었으나, 어머에게도 모든 것이었다.


누구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모두 나빴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우린 각자가 정말 사랑했던 한 사람을 잃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불행은 결이 달라 서로에게 위로가 되진 못했지만 어쨌거나 서로가 굳세게 살아가주길 바라는 마음만큼은 같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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