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작년 가을에 입사한 신입사원이다.
“야 일주일 전에 우리 지점으로 발령 난 대리년 있거든? 근데 날 상종도 안 해."
"왜? 알던 사람이야?"
"전에 나 여직원하고 싸웠던 거. 그거 들었겠지. 이 바닥이 원래 존나 좁잖아."
"성격일 수 있잖아. 다른 사람한테는 어떤데?"
"그냥 얘기 잘하는 거 같던데? 어쨌든 난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고."
"헐.."
"심지어 인사도 안 받아. 시발.. 진짜 어이가 없어서."
요목조목 말하는 본새가 귀여웠다. 면접관을 설득시키는 수험생을 떠올렸다.
'이 세계가 원래 이렇게 냉혹하단다.'
이런 말 하긴 좀 겸연쩍지만, 타인의 불행에 느끼는 기쁨을 독일 사람들은 샤덴 프로이데라고 부른다. 인간이 이렇게 복잡하다.
3년 전쯤일까. 입장 바꿔 말하자면, 나의 넋두리는 설자리가 없었다.
"그리니까 우리 점장님이..."
“그게 취준생 앞에서 할 소리냐. 호강에 겨운 소리 하지 마. 짜증 나니까.”
그에겐 내 하소연이 겸손을 위장한 자기 비하 정도로 들렸나 보다.
그랬던 그가 은행원이 되었고, 나에게 되려 푸념 중이다. 이번엔 내가 그를 심판할 차례다. 내 판사봉은 차가웠다.
나는 내 입사년차가 무슨 훈장이라도 된 마냥, 미묘한 우월감에 취해 1년 차 신입에게 조언을 나열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30분이 넘는 통화시간이 서로의 자별함을 보여주었고, A는 고맙다며 마지막 말을 던지고, 자러 갔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 그냥 무시하라는 거지?”
30분의 대화를 한마디로 요약하기엔, 내 디테일이 훼손되는 것 같았다. 심지어 틀렸다. 그 말이 아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조금 더 복잡하고, 무거웠으며, 심오했다.
한 달이 지났다. 이 시간은 김치가 익어가는, 장아찌도 절여지는 웬만한 양념장들이 숙성되어가는 세월이지 않은가. 그때의 대화가 무르익으니, 부끄럽기 시작했다. 과연 그가 필요했던 게 조언이었을까.
스쳐 지나가는 뉴스 한 구절이 뚜렷하게 들렸다. 요약하자면, 코로나 19로 아이들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져 가족 간의 불화가 잦다는 내용이었다. 인터뷰 중인 초등학생이 답했다.
“간섭보다 싫은 것이 충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