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써보는 금연 비망록
“여기 보이시는 혈관이 상당히 좁습니다.”
“네?”
“담배 피시나요?”
“아..예..좀 핍니다.”
“가족력이 있나요?”
아버지는 작년에 급성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시술을 권했고, 당장 담배를 끊으라고 덧붙였다. 그동안 내 세계에서 의사는 공부 잘하는 사람, 그러니까 수능을 잘 봐 좋은 대학에 간 그런 부류 정도였다. 난 젊고 건강했으니까. 하지만 처음 겪어보는 질병 앞에서 선고를 내리는 의사의 권위는 대단했다. 앞으로 나는 늙고 병들어 갈 테니까. 조금 과장하자면, 그는 내 죽음을 쥐었다 펼 수 있는 절대자였다.
주머니엔 두 개피 뿐이 피지 않은 말보로 1갑이 있었다. 담배를 피웠던 몇 년의 기억들이 뇌리를 스쳤다. 식사 후에도 부족했던 허기짐을 채워 준 포만의 기억, 술기운을 더 끌어 올려 주었던 황홀함, 혈연 지연보다 강했던 흡연의 연대. 나는 과정을 찬양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는데, 결과는 생각보다 강렬했다. 담배에 관한 좋은 기억들이 한순간에 메스껍고, 역겨워졌다. 그리고 나는 말보로를 버렸다.
하지만 나는 나약한 중생에 불과했다. 무지한 나의 믿음은 느슨했고, 그래서 의심했다. 그리고 더 큰 절대자를 찾아 서울에 있는 병원을 찾았다. 의사의 소견서에는“관상동맥 경화”라는 병명이 기재되어 있었다. 자료를 제출하러, 정밀 검사를 받으러, 그리고 검사결과를 듣기 위해 3번의 휴가를 썼고, 3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3개월이란 무척 긴 시간이었다. 죽음을 상상했다. 무서웠고, 덧없었으며, 무기력했다. 그리고 지금 죽기엔 내 젊은 날이 아까웠다. 불안을 잠재우기엔 의술만으로는 역부족했을까, 한 번도 믿어본 적 없는 신을 떠올리며 기도했으며, 두어 번의 사주도 보았다. 심지어 나빼고 다 잘 살고 있는 남들 모습이 싫어 인스타그램도 삭제했다.
삶을 상상했다. 이왕이면 잘 사는 삶 말이다. 하지만 잘 모르겠기에 후회부터 떠올랐다. 첫 번째 후회는 생계에서 왔다. 외제차 끌고 다니는 친구의 연봉을 시기하면서 나보다 실수령액이 적은 이에게 위로받는 걸 능력이라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하찮은가. 나는 돈과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들 사이에서 비참하거나 교만했다.
두 번째 후회는 관계다. 다음 날 소주병 개수를 헤아리며 돈독함을 확인하는 술자리 우정이 의심 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친구든 직장 동료든 술과 함께하는 대화의 8할은 뒷담화와 하소연이었으니까.
마지막 후회는 시간이다. 침대에 누워 SNS피드를 넘기다 또는 유튜브를 보다가 자야 할 시간마저 놓쳐버리는 건 더이상 여유가 아니었다. 언뜻 온전한 나만의 시간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유튜버들과 인플로언서들에게 바치는 제물이었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얼마나 답답한가. 살고 싶었다. 너무 살고 싶은 바람들이 생리 현상처럼 다가왔다. 그러니까 나는 삶이 마려웠다. 그렇게 어느덧 검사결과 날이 다가왔다.
큰 병원에서 말하는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혈관이 좁아진 건 사실인데, 기능검사 결과 정상이다.’
그 날 나는 새 삶을 얻었다. 친구들과 축배를 들었다. 술기운이 얼큰해질 때쯤, 다 같이 담배를 피우러 나왔다. A는 나에게 담배를 건냈다.
“야 괜찮다매? 한대필려?”
나는 담배를 집어들었고, 불을 청했다.
“야ㅋ이새끼 정신 못차렸네?”
그는 장난이라며 담배를 다시 빼앗아 갔다. 병주고 약주는 나쁜새끼.
집에 가는 길, 수치심이 밀려 닥쳤다. 나는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었다. 걔가 권했고 분위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방어기제, 무엇보다 결과적으로 피지 않았다는 정신승리. 결과라니..얄팍했다. 그러자 지난 3개월의 과정들이 날 비웃듯 속삭였다. 그동안의 서울을 오갔던 수고스러움이 헛되었고, 후회에 대한 반성들은 자기기만이 되었으며, 후회 없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은 위선으로 바뀌었다. 이 모든 생각과 행동들이 엄살이었고 궁상이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했던가. 결과의 아쉬움은 끝이 없고,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반성은 너무 얄궂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