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페르시아 수업> 진실을 말하다
사람들은 ‘거짓말’이라는 단어에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갖는다. 당연하다. 거짓말은 누군가를 속이고, 배신하고, 진실을 감추는 기술이니까.
그런데 이 경계심은 때때로 냉소로 이어진다.
“소설 같은 소리 하네.”
이 말에는 이미 비웃음이 묻어있다. 소설은 그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쯤으로 취급된다.
그럼 나도 짐작해 보자. 그런 말을 쉽게 내뱉는 사람들은, 아마도 아주 바쁜 사람들일 것이다. 성과가 상상보다 시급한 사람들. 그러니 잠시 멈춰 허구를 받아들이는 일조차 사치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야기는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다. 이야기가 거짓의 형식을 입을 때, 오히려 진실에 더 가까워진다. 숫자와 연표가 담지 못한 감정과 고통은, 종종 한 편의 영화 속 허구가 더 정확히 전달한다.
예컨대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은 거짓말로 생존을 이어가는 한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이 얼마나 정교하고 절박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주인공 ‘질’은 총살직전, “나는 페르시아인이다.”라는 한마디 거짓말로 목숨을 건진다. 그리고 우연히도 페르시아어를 배우고 싶어 하던 나치 장교 ‘코흐’에게 붙잡힌다. 그 순간부터 질은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매일 창조해 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오늘 가르친 단어는 반드시 기억해야 하고, 그 기억은 다음날의 거짓말이 된다. 하루 네 단어. 전쟁이 끝날 무렵이면 이천단어. 그는 끝없는 기억의 미로 속에서 목숨을 건 이야기를 창조한다.
질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 속에는 전쟁과 생존, 언어와 정체성, 인간의 존엄을 향한 깊은 진실이 담겨 있다.
사람은 말로 세계를 구성한다. 말이 닿지 않는 곳엔, 생각도 닿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허구를 발명하고, 이야기를 만든다. 거짓에서 시작된 문장이, 오히려 가장 깊은 진실을 건드릴 때가 있다.
물론 모든 거짓이 진실을 향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거짓은, 진실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
그러니까, ‘거짓이냐, 사실이냐’ 문제는 진작부터 우리 이야기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