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들여 진다는 것

영화 <터미널>

by 산문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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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빅터는 들뜬 마음으로 존 F. 케네디 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동유럽의 작은 나라 크로코지아에서 뉴욕으로 오는 길. 빅터의 고국에서는 내전이 일어났고, 크로코지아는 무정부 상태에 빠진다.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되돌아갈 수도 없고, 공항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어느 외국인이 겪은 9개월 동안의 체류기다.



공항 관계자들에게 영어도 할 줄 모르고, 이름 모를 나라에서 온 빅터는 낯선 존재다. 그는 외국인이자, 이방인, 그리고 남이다. 빅터에겐 며칠 분의 짐뿐이다. 그는 잘 곳도 없고, 당장 먹을 것도 없다.



일상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어떤 낙차가 있다면, 그것을 재미라 부르면 어떨까. 평범한 일들이 일어날 필요가 없는 장소에서 벌어지니, 일상은 신선해지기 시작한다. 의자를 이어 잠자리를 만들고, 공중화장실에서 면도를 하고, 카트를 정리하며 벌어들인 동전으로 사 먹는 버거킹까지. 이 모든 것들이 공항 안에서 일어나면, 재밌다. 공항 직원들은 그런 낯선 이가 맘에 들기 시작한다.



이방인은 적응하기 시작한다. 사랑의 전령이 되어 짝사랑하는 이를 돕고, 탁월한 손재주로 일자리를 얻기도 한다. 어느 날 동유럽 언어를 통역해야 하는 사건이 생겼고, 그는 원칙과 융통성 사이에서 고민한다. 빅터는 고지식하지 않았고 가엾은 이를 도왔지만, 이것은 원칙을 비틀며 권위에 맞선 행동이다. 순탄치 않을 공항 생활이 예상되는 건 불안 이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위안이었다. 그리고 빅터는 받아들여진다.



낯선 공간에서의 타자로부터 받아들임. 김영하 작가는 거부당하지 않는 그것을 안정감이라 여겼다. 낯선 곳에 도착하여 두렵지만, 결국 받아들여지고, 안도한 뒤, 또 다른 곳으로 떠났다. 이것이 아마 역마의 본질일 것이다.



정착하고 있을 때의 우리는 somebody이다. 이들의 받아들여짐은 조금 다르다. 정착 사회의 관계 속에서 '나'라는 기본값을 높인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그 사람의 직업일 수도 있고, 연봉일 수도 있다. 가족일 수도 있고, 친인척을 포함한 넓은 인맥일 수도 있다. 과거 농업기반 사회에서는 물꼬를 통제하는 자가 지위를 뒷받침했다. 복잡한 이해관계의 사슬. 정착 사회가 돌아가는 시스템 속에서, 섬바디는 그렇게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빅터라는 인물이 너무나도 멋진 이유는 그가 Nobody이기 때문이다. 상황은 그를 구속하지 못했고, 그는 됨됨이를 보여 주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니었을 때 드러나는 노바디의 자질이랄까.



세네카. 로마제국의 황제 네로의 스승으로 알려진 그는 정치인, 철학자, 작가다. 그는 누구보다 명성을 떨쳤고 출세한 인물이다. 그랬던 그가 자신의 마당 한구석에 작은 오두막집을 지었다. 아기돼지 삼 형제의 둘째 돼지가 지을 법한 견고하지 않은 통나무집 말이다. 세네카는 좋은 저택을 내버려 두고 그곳에서 주기적으로 먹고 잤다고 한다. 모든 걸 잃었을 때의 상황을 연습하며 가진 자의 불안을 내려놓았던 것이다.



모두가 훌륭한 사람이 되길 원하는 세상에서,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상상을 해보는 건 어떨까. 일종의 노바디가 되는 연습. 어차피 삶이라는 게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 같아서, 해탈한 척 한번 해봤다.


영화 <터미널>

『여행의 이유』김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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