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틀 포레스트>
리틀포레스트는 시골살이를 꿈꾸게 하는 영화다. 고기반찬 없는 밥상이 탐탁지 않은 나조차 영화를 보고나니, 당장에라도 손수 재배한 야채가 먹고 싶다. 세상은 이미 모든 걸 팔 준비가 됐고, 힐링도 정갈하게 진열돼 있지 않은가. 그래서 안락한 먹방에 사로잡혀 시골이 도시 생활의 찌듦을 씻겨주는 유토피아로만 남기엔 뭔가 아쉽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힙스터들의 유유자적으로만 본다면, 그건 오산이다.
물론 영화는 시험, 취업, 연애 그 어느 하나 얻지 못하고 돌아오는 귀향의 플롯을 선택했지만, 그것 또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기에 이야기는 담백하다. 혜원의 전원생활은 따뜻하지만, 주변 인물들의 걱정은 따끔하다. 각자의 청춘은 나름의 잡음과 사연으로 가득 차있고, 도피하듯 고향에 온 혜원도 마찬가지다. 뭔가 중요한 일을 외면했다는 것. 아직 해결할 일이 남아 있는 것.
아버지를 일찍 여윈 혜원은 엄마 손에 컸다. 그녀가 스무 살이 되던 해, 혜원의 엄마는 편지 한 통만 남기고 못다 한 꿈을 찾아 떠났다. 아무렴 머리는 이해해도, 서운한 가슴은 따로 논다. 혜원은 엄마가 밉다. 하지만 시골로 돌아온 그녀가 전원생활에 적응할수록 엄마에 대한 기억은 생각보다 괜찮다.(아마 훌륭하다는 표현이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요리의 역할이고, 청량한 먹방은 덤이다.
영화의 묘미는 그녀가 계절을 겪으며 어렴풋한 과거를 다시 배열하는 모습에서 나온다. 편집은 곧 성숙이다. 토마토가 싹트고, 줄기가 오르고, 열매를 맺었다면, 익어가는 것은 혜원의 몫이다. 엄마는 혜원을 이곳에 심고 뿌리 내렸다. 그녀가 힘들 때마다 고향의 흙냄새와 바람,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거라는 걸 엄마는 믿었다.
케렌시아(Querencia). 스페인어로 피난처, 안식처, 귀소본능을 뜻한다. 투우가 진행되는 동안 소는 위협을 피할만한 경기장의 특정 장소를 기억해 두고 그곳을 케렌시아로 삼는다. 그리고 숨을 고르며 마지막 에너지를 모은다. 엄마가 만들어준 케렌시아 덕분에 혜원은 다시 서울로 떠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겨울을 나겠고, 외면한 걸 마주하고, 시련을 겪을 것이다. 겨울을 겪어낸 양파는 봄에 심은 양파보다 더 달고 단단할 테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랬다. 청춘은 원래 아픈 것이라고, 라떼는 그랬다는 진심 어린 충고보다 리틀 포레스트를 감상시켜주는 어른이 더 소통에 가까울 것 같다. 물론 전제가 있다. 영화만 보여줄 것. 느낀 점을 묻지도 말고, 어땠냐는 기대도 없이 오로지 영화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