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주년 결혼기념여행 1

둘이 시작해서 넷이 되다!

by narihwa

12월 17일은 우리의 결혼 30주년 기념일이다. 30년 전 나와 그는 호주로 신혼여행을 떠났고 시드니 호텔에서 첫날밤에 몇 가지 약속을 했더랬다. 결혼식에 해주었던 다이아 반지가 너무 작아서 마음에 걸렸던 것인지 결혼 10년 차에는 1캐럿의 다이아를, 20년 차에는 아이들과 함께 호주로 다시 가는 신혼여행을, 그리고 30년 차에는 리마인드 웨딩을 말이다. 서약이나 맹세는 본래 깨지라고 있는 법이며 30년 간 두 아들 키우며 바삐 살다 보니 세 가지 약속 중 어느 하나도 지켜지지 못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너무하다 싶었는지 올초부터 틈만 나면 나를 채근하며 30주년 기념으로 둘이서 오붓하게 여행을 떠나자고 보챘다. 12월 말이면 날씨도 추워지고 무엇보다 남편이 긴 시간을 낼 수 없기에 10월 추석을 전후해서 열흘 간의 연휴가 어딘가로 떠나기에는 최적의 시기라고 생각하여 검색에 들어갔다.

그동안 직장에서 보내준 연수프로그램으로 뉴질랜드, 미국 샌디에이고와 하와이에서는 한 달 연수를 일리노이주에서 1년간 지냈고 여행 모임에서는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등을 다녀왔다. 나의 버킷 리스트에는 이탈리아 한 달 살기가 저장되어 있고 남편이 은퇴 후 회갑 기념으로 다녀오려고 여행경비도 두둑이 모아두었다. 열흘의 10월 초는 극성수기라서 비용이 상당했지만 한 달 살기 모아둔 비상금으로 충분히 커버할 만했다.

오랫동안 검토하고 비교해서 두 개의 패키지 상품을 보여주며 남편에게 고르라고 했더니 어째 표정이 당황스럽다.

- " 왜? 맘에 안 들어? 다른 걸로 더 찾아볼까?"

- " 아니, 두 가지 다 맘에는 드는데..."

- " 그럼 뭐가 문제야?"

- " 음... 6일이 추석이니까 어머니랑 추석 지내고 7일부터 5박 6일로 가는 거면 좋겠는데..."

- " 요번처럼 자기가 은퇴하기 전에 열흘씩이나 휴가 낼 수 있는 연휴가 흔하지 않으니 이번 한 번만 다녀오면 안 될까? 추석 전에 미리 어머님께 다녀와도 안 돼?"

- " 응, 아버지도 안 계신데 엄마 혼자 형네 가족이랑 명절 보내게 하고 싶지가 않아. 나중에 어머니 돌아가시면 그땐 어디든 가자!"

어머님은 올해 87세로 그 또래의 다른 어르신들에 비하면 음식도 잘 드시고 정정한 편이시다. 효자 남편은 어머니를 남겨두고 가는 여행은 이탈리아 아니라 더 좋은 곳이라 해도 마음이 불편할 것 같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내가 맘을 접어야지...


그리하여 4박 5일간의 거제와 부산 여행으로 급선회했고 둘이서 가려했던 여행은 넷이 되었다. 작년부터 남편의 혈당 수치가 올라가서 식후에 운전을 하면 혈당스파이크가 높아져서 졸음운전을 하게 되어 몇 번이나 위험한 적이 있었다. 큰 애는 오후에 운전을 제가 하겠다며, 본인이 결혼하면 네 명이서 함께 여행 가기 힘들 수도 있으니 기꺼이 동참하겠단다. 작은 애는 처음엔 셋이 다녀오라며 시큰둥하더니 결국은 넷이 가게 되었다.

거제는 여러 번 다녀왔지만 넷이서 가는 건 처음이라 설레는 기분이었다. 외도 유람선을 타려고 선착장 터미널로 갔지만 바람이 많이 불어서 기상악화로 모든 배편이 취소되었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날씨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 대신 우제봉 전망대로 가는 해변 데크길을 걷는 동안 날씨는 약간 흐리고 간간히 비도 뿌려주었는데 덥지 않아서 오히려 좋았다. 해금강 트래킹 길을 걷기에 더할 나위 없었고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해금강은 진한 다크 그린으로 넘실거렸다. 작년 담배를 끊고 나서 배가 나오기 시작한 남편은 유독 숨을 헐떡이며 걷기 힘들어해서 셋이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식물원2.jpg


케이블 카를 타고 높은 곳에 올라가 거제 시내와 바다를 한눈에 조망하면서 넷이서 함께한 지난 30년을 돌아보았다. 아이들 어릴 적엔 두 번이나 잃어버릴 뻔했다가 무사히 찾았고 40도가 넘는 열경기로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멜 때는 그것이 마지막이 될까 봐 심장이 쪼그라들기도 했었다. 착하고 부모 속을 썩인 적이 없던 두 아이에게도 사춘기는 어김없이 찾아와서 큰 아이는 고1 때 작은 아이는 중2 때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기도 했다. 매년 수백 명의 아이들을 가르치며 소통과 교류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는데 정작 내 아이들에게 무서운 사춘기 병이 오니 엄마로서 내가 부족한가 싶어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된 남편과의 갈등으로 한 때는 헤어질 결심을 한 적도 있었는데 그 절망스러운 시기를 넘기고 나니 이제는 밥동무, 말동무, 몸동무가 되어 소박한 찬과 국으로 같이 밥을 먹고 유튜브나 넷플릭스 보면서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그 기능이 쇠해가는 몸걱정하며 서로 영양제를 챙겨주고 있다.


거제식물원.jpg 거제 식물원


구름이 지나가고 기온이 28도로 올라가니 더위를 피할 곳으로 거제 식물원으로 이동했다. 대여섯 번 넘게 거제를 다녀왔지만 한 번도 식물원 갈 생각을 안 했는데 규모도 상당하고 다른 식물원과 달리 내부에 사람이 그리 많았는데도 시원하고 쾌적해서 더 좋았다. 실내폭포도 아름답고 말이다.

바람의 언덕과 신선대에서 선선한 바람을 쏘이고 바다 내음도 실컷 맡았다. 전에 친구들과 한 번 다녀온 적 있는 키친 루셀로를 예약해서 와인을 곁들여 맛나게 한 끼를 먹었다. 시장이 반찬이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지 않던가? 모두들 배가 고팠던지 그릇까지 깨끗하게 먹어치울 기세였다.


키친루셀로.jpg 키친 루셀로




최근에 즐겨 보았던 드라마 [Esquire] 마지막회 12화에 그런 대사가 나온다.

3년 연애하고 7년간의 결혼 생활 이후에 이혼한 윤석훈 변호사(이진욱)는 결혼과 사랑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강효민 변호사(정채연)에게 사랑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열정적일 수가 없다고 말한다.


"부부의 사랑은 열정으로 시작해서 현실을 지나 연대로 이어지는 감정이 아닐까요? 열정이 사라진다고 해서 사랑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연대감, 의리, 소속감 그런 것도 사랑의 다른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누군가는 결혼은 연애의 무덤이고 어떤 이는 결혼 제도가 갖는 불합리함이 싫어서 사랑과 연애만 하겠다고도 한다.

30년 전에 내가 결혼하던 그 시절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넌 다시 태어나도 결혼할 거야? 결혼한다면 이 남자랑 또 할 거야?"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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