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든든한 보디가드
거제에서 부산으로 넘어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태종대였다. 두 아들은 부산에 오기 전에는 태종대가 부산에 있는 어느 대학 이름인 줄 알았다고. 태종대에서 셔틀 열차를 타고 전망대에서 내려 망원경으로 대마도를 보기도 하고 주전자 모양의 바위가 보이는 곳에서 사진 한 컷을 찍기도 했다.
감천문화마을은 스무 살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사촌들이랑 기차 타고 여행 가서 사촌오빠의 친구 집이 감천 언덕배기에 있어 그곳에서 3일간 놀다 왔더랬다. 당시에는 다닥다닥 붙은 언덕배기 골목길에 작은 점빵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온통 기념품 가게와 카페랑 식당들로 북적였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어찌나 많던지 격세지감을 느꼈다. 어린 왕자 동상 앞에서는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늘어선 줄이 족히 100m는 될 것 같았다.
본래 큰 아이 성격은 시크한 차도남인데 지금의 여친이랑 2년 정도 연애를 하더니 스윗한 남자가 되었다. 국내든 해외든 여행지에 갈 때마다 마그네틱 자석과 스푼을 모으는 엄마의 취미를 아는 큰 애는 감천마을이 아름답게 그려진 마그네틱도 두 개나 골라주고 사진 스팟이 나올 때마다 나를 세워놓고 이리저리 각도를 달리해가며 다리 기럭지가 최대한 길게 나오도록 사진을 찍어준다. 걸음이 빠른 남편은 늘 10m 앞에서 걷고 있는데 두 아들은 양쪽에서 내 보폭에 맞추어 나란히 걸어준다.
해금강 트래킹 길에서 등산을 싫어하는 남편은 저만큼 뒤처져서 숨을 가쁘게 쉬며 오는 중이었고, 두 아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행여나 내가 발을 헛디디지 않을까 앞뒤로 케어하니 마치 든든한 보디가드 두 명이 옆에 있는 기분이었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는 넘어질까 노심초사했고 처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칠 때는 운동장 흙바닥에 무릎이 다칠까 전전긍긍했는데 이젠 나를 지켜주는 보호자가 셋이나 되는 기분이네!
흰여울마을은 바닷가를 따라 작은 집과 소품샵 카페들이 길게 줄 지어 있고 닥밭골 벽화마을은 6가지 테마를 가진 벽화마을인데 연로하신 마을 어른들을 위해 경사진 계단 위에 모노레일을 만들었다.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 이후 정착한 주민들과 구본호 작가가 2010년에 함께 조성했다. 192개로 이루어진 마을의 소망계단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어서 올라갈 때는 모노레일을 타고 내려올 때는 걸어 내려오면서 소원을 빌었다.(어떤 소원이냐고? 안알랴주지~ 말해버리면 소원이 안 이루어질수도 있잖아! 다 이루어질지니!)
해동용궁사에 들러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하고 기장 카페 피크스퀘어에서는 야외 테라스에 앉아서 잠시 바다 멍을 때렸다. 우리에게 정해진 시간은 채 100년이 안 되는데 욕망덩어리인 인간은 양손에 욕심을 그득그득 움켜쥐고 내려놓지를 못하고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으니 언제쯤이나 마음속에 고요한 평안이 찾아올까? 이번 여행길에 데려간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 - 우리가 혈안이 되어 추구하는 것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들은 이 거대한 세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오카다 도루는 오래간만에 삶에 휴식을 안겨주는 인물이었다.
부산 여행하던 날은 인디언썸머처럼 갑자기 늦더위가 와서 땀 흘리기를 싫어하는 세 남자를 위해 해양박물관 일정을 넣어두었다. 박물관이라니 썩 달갑지 않아 하던 남자들은 1층에 들어서자마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서 금세 쾌적해졌고 박물관 내부의 전시실이나 미디어 영상관들 컨텐츠가 제법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아쿠아리움은 규모가 작긴 했지만 심해열대어들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특히 박물관 1층 도서관 규모가 상당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하는 큰 애는 읽고 싶던 <용의자 X의 헌신>을 우연히 서가에서 발견하고는 한 시간 넘게 푹 빠져서 도무지 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못했다.
7시에 광안리에서 드론쇼를 보려면 5시에는 꼬막 거리에 있는 친구에게 추천받은 꼬막식당으로 가야 했기에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역시나 맛집답게 꼬막무침, 꼬막비빔밥, 꼬막장등 맛난 꼬막 한 상에 고구마 새우튀김도 어찌나 바삭하던지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광안리 드론쇼를 명당자리에서 보겠다는 욕심에 눈이 어두워 광안리 해변 내려가는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그만 모래사장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무릎이 까지고 살점이 파인 데다가 심한 타박상을 입고 말았다. 여태 여행 잘하고는 마지막 일정에 일어난 사고로 망연자실해서 드론쇼는 보는 둥 마는 둥 울적한 기분으로 앉아 있는데 순식간에 세 남자가 사라졌다!!!
잠시 후에 나타난 그들 손에는 냉찜질할 얼음컵, 편의점에서 파는 밴드랑 약국에서 사 온 이지덤과 파스 소독약까지 의사면허도 없는 사람들이 <백번의 추억>에 나오는 한재필(허남준 분)처럼 일사불란하게 치료하고는 숙소로 안전하게 돌아왔다. 사고가 없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예기치 못한 나의 실수에 그 누구도 잔소리나 푸념을 하지도 않고 내가 괜찮은지만 신경을 쓰더라. 마음 한 켠에서는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이런 게 가족이지 그냥 묵묵히 들어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 사랑하는 가족들이 안 다치고 내가 다쳐서 얼마나 다행인가! 비록 잠깐이긴 했지만 나는 고영례(김다미 분)가 된 기분이었다.
- 그래서 다시 태어나도 결혼할 거야?
- 응. 다시 할래!
- 지금 니 옆에 있는 그 남자랑?
- 그래, 이 남자랑~
- 30년을 살았는데 질리지 않아? 다음 생에는 다른 사람이랑 결혼해 보는 건 어때?
- 아니, 완벽히 서로 다른 타인이었는데 이만큼 맞추는 데 30년이 걸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