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날 May 09. 2023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지난달엔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3일간 출근하지 않은 날들이 있었다. 출근하지 않은 기간에 생긴 작은 에피소드를 글로 남겨본다.


올해 나는 합주 동아리를 맡게 되었다. 몇몇 선생님들을 거쳐 내게 온 합주 동아리는, 보는 나도 학생들도 그 조합이 어색하기만 하다. 사회 선생님이 합주 동아리 지도를 하는 것이 평범한 상황은 아니지만, 구성된 지 1년이 넘은 합주반 멤버들이 잘할 거라 믿으며 나는 동아리 담당 부장님의 권유를 수락했다.


동아리 활동 첫날에는 자기소개와 함께 긴 회의를 거쳐 앞으로 연습할 곡을 2개 선정했다. 두 번째 동아리 활동 날엔 선정된 곡들을 처음으로 연습해 볼 예정이었으나, 나는 앞서 언급한 슬픈 일로 인해 출근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누군진 모르겠지만 자리를 비운 나 대신 합주반을 지도해 주실 선생님께 드릴 메시지를 급히 작성했다.


합주반 담당 선생님

노트북 - 비밀번호 xxxx - 바탕화면에 합주반 폴더 - how far I ll go와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악보 출력 후 연습하게 하시면 됩니다.


장례를 마친 후, 주말이 다 가고 오랜만에 출근하는 날, 교무실에 도착하니 책상 위에는 그동안 보강을 들어가신 선생님들이 수합하신 사회 학습지와 악보 뭉치가 놓여있었다. 사회 학습지는 내가 만들었던 모습 그대로였는데 악보는 조금 달랐다. 음표가 어느 위치에 있는 건지 알아보기 힘들게, 작게 출력되어 있었다. 이런 악보를 보고 연주하기가 힘들었을 텐데 싶었지만, 지나간 일이니 별생각 없이 다음 할 일을 했다.


그리고 점심시간, 식당에서 만난 동아리 활동 담당 부장님은 그간 있던 에피소드를 내게 이야기해 주셨다. 그분은 'how far I ll go와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악보 출력 후 연습하게 하시면 됩니다.'라는 나의 메시지를 보고 한참 고민하셨다고 한다. 여러 장짜리인 how far I ll go를 어떻게 하면 한 페이지에 출력할 수 있는가를. 일단 모아 찍기를 하셨다. 양면 인쇄까지 하셨을지도. 그렇게 모아나 OST인 How Far I'll Go를 한 페이지에 모두 볼 수 있도록 출력하신 후, 합주반 학생들에게 주었더니 학생들은 악보 하나가 없다고 했다고 한다.


여기까지 읽으면 예상이 되겠지만,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는 출력 옵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곡명이다. DAY6라는 밴드의 노래. 이 이야기를 듣고 내가 그날 보낸 메시지를 다시 확인해 보니 정말 오해하기 쉽도록 써놨음이 인정되었다. 곡명에 작은따옴표로 표시를 하거나 적절한 조사를 사용했다면 의사소통의 오류는 없었을 텐데, 아무튼 의사소통의 오류로 인해 작은 에피소드가 생겼고, 오랜만에 글 쓸 거리가 생겼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DAY6라는 밴드는 연주도 잘하고 노래도 참 좋다.







작가의 이전글 감사일기(2023.04.0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