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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불행을 견디는 법이 아니라, 불행을 활용하는 법

by 나린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jpg

별점: ★★★★★+★


나는 20대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냈다. 그래서일까, 한국어로 대화하고 글을 쓰는 게 너무 좋다. 현재 캐나다에 거주 중이지만, 한국인들과 소통하고 교류하고 싶어 한국인들만 가입된 그림 모임에 매달 나가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취미가 흔한 편은 아니다. 나는 디자인을 전공했기에 취미로 그림을 그리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땅한 취미가 없는 듯하다. 또 취미를 가진 사람들은 한 가지에 머무르지 않고 두세 가지를 함께 즐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그림 모임의 구성원들은 모두 독서를 좋아하고 대부분이 경제와 철학에 관심이 깊다. 정치나 전시회에도 큰 흥미를 보인다.

그중 A라는 분이 있다. 그는 철학에 대한 깊은 관심과 흥미로운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가 명저라며 강력 추천한 책이 바로 죽음의 수용소다.


사실 책의 이름을 들었을 때, 또 책의 표지를 보았을 때 줄거리에 대한 예측은 꽤나 쉬웠다.(물론 잔인함의 정도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나치 수용소에서 겪은 처참하고 비극적인 일들에 대한 기록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초반 80% 책의 줄거리는 수용소에서의 가혹한 현실과 프랭클린 박사의 일지들이었다. 얼마나 적은 양의 식량을 주었는지, 얼마나 추웠는지, 얼마나 매정한 대우를 받았는지 등등 참혹한 현실 그 자체였다. 신발 끈이 그렇게나 중요한 존재인 지 이 책을 펴기 전까지 알지 못했다. 나의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 대목이다. 그들의 비극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나의 불행은 누군가의 꿈이다.


지난번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대한 독후감을 작성할 때도 다뤘던 주제이지만, 내가 지금 불만을 가진 그 어떤 것도 나치 수용소의 수용자들에게는 매일 밤 그리던 꿈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일하는 게 고되어도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매일 볼 수 있는 것, 가끔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어도 내가 원할 때 밖으로 나가 산책할 수 있는 것, 스트레스에 잠을 설쳐도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는 것. 말 그대로 나의 조그만 불행이 그들에게는 막연한 꿈인 것이다.


최근에 한국 귀국을 준비하느라 큰돈이 나갈 일들이 많았다. 나와 남편은 짐만 싸면 그만이지만 반려동물이 둘이나 있는 우리는 그들을 위해 준비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였다. 돈은 돈대로 들고 머리는 아프고 서류 발급이 언제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비행기 티켓도 구매할 수가 없었다. 스트레스를 받고 걱정을 하고 불만이 생겼다. 하지만 나에게는 자유가 있지 않은가. 내가 원하면 언제든 어디로든 갈 수 있지 않은가. 우리의 불만은 우리가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인 지 보여주는 지표이다. 그리고 나의 불만은 멈췄다.


책의 후반으로 갈수록 프랭클 박사가 연구하고 또 창시한 '로고테라피'가 주제로 자리 잡는다. 로고테라피란 삶의 의미(로고, λόγος)를 찾음으로써 심리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심리치료 방법이다. 다양한 심리학자들이 인간은 쾌락, 명예, 관심, 사랑 등을 추구한다고 할 때에 그는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존재라고 정의하였다. 사실 '죽음의 수용소'는 내가 여태껏 읽었던 심리학 저서들 중 단연 손꼽히는 명저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프랭클 박사가 나의 삶의 문제 대부분을 책 한 권으로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나의 아침은 '죽음의 수용소 인용문 14'를 읽으며 시작한다. 이것은 내가 책을 읽으며 감명받았던 구절들을 정리한 메모인데 1번부터 차례로 공유해 보자면,

1. 허무주의는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2.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그 순간 모든 것들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저장되고 보존된다.
3. 경험은 성취만큼이나 값지다.
4.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
5. 싸우지 마라. 비웃어라.
6. 쾌락은 어떤 행위의 부산물이자 파생물로 얻어지는 것이고, 또 그렇게 얻어져야만 한다.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면 그것은 파괴되고 망가진다.> 과잉 투사/ 과잉 의도
7. 가능성 대신에 내 과거 속 실체를 기억하라.
8. 무능함을 인정하라.
9. 불필요한 고통은 그저 자기 학대에 불과하다.
10.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 의지로 선택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11. 실존적 좌절 그 자체는 병적인 것도 병원적인 것도 아니다.
12.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딘다.
13.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14. 내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나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위 내용과 같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도움이 많이 되었던 구절은 굵은 글씨로 표기해 두었다.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는 표현은 정말 신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현대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들리는 표현들은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던가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라던가 하는 YOLO 적 표현들뿐이다. 그러나 작가는 당신이 이미 실패한 경험이 있고 그 기회를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겠는가라고 묻는다. 인생에서 누구나 후회할 법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한다. 최선을 다하지 않거나, 말실수를 하거나, 누군가의 불찰로 크게 다치거나...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 나의 실수를 교정할 기회를 누군가 주었다고 생각해 보자. 엄청난 기회가 아닌가?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바로 나 자신이다. 일상생활에 바로 적용하기란 물론 힘들 수 있다. 나 역시도 이러한 생각을 완전히 습관화하려면 아직 많이 멀었다.


나는 선천적으로 예민하고 불안감이 높은데 이것은 나의 기질이라 잘 바뀌지 않는다.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시도는 여러 가지 해보았으나 결론적으로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없었다. 약물 치료, 상담, 나의 문제를 직접 직면하기 등등 모두 허투루 끝났다. 그러나 과잉 투사와 과잉 의도를 이해하고, 직접적인 문제가 아닌 다른 곳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은 꽤나 효과가 있었다. 예를 들어 나는 결벽증이 있는데 특히 바닥에 누군가 뱉어둔 침을 견디지 못한다. 프랭클 박사의 말대로 나는 더러운 것을 볼 때마다 오히려 운이 좋은 듯 미소를 짓고 뜻밖의 행운을 만난 듯 행동했다. 그러자 이 상황 자체가 웃긴 것이 아닌가. 2-3개월 전의 나라면 그에 스트레스를 받고 적어도 10분간은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정신과 상담을 받아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정신과 의사들의 대답은 꽤나 형식적이다. "최선을 다할 필요 없어요." "자신을 쉬게 내버려두세요." "휴식을 취할 때 죄책감을 가지지 마세요." 스트레스를 줄이고 바쁜 현대 사회 속 안정을 취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흔히들 알고 있는 번아웃 증후군이 만연하게 퍼지면서 그들은 과한 열정이 해롭다고 사람들에게 전한다. 물론 뭐든 정도를 넘어서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열정과 목표는 인간에게 필수적이다. 내 생각에 번아웃 증후군의 가장 큰 원인은 의미 없는 열정이다. 한국인들은 대학교에 가기 위해 최소 3년 이상을 달린다. 대학교 과정 속에서도 장학금이나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한다. 대학교를 졸업하면 취직을 위해 2-3년을 다시 달린다. 이 과정 속 당신이 정말 원해서, 진심으로 열정이 느껴져서 실행한 것이 있는가?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대학교를 가는 이유는 다들 가기 때문이 아닌가? 회사도 눈을 조금만 낮추면 어디든 입사할 수 있지만 남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는가? 대한민국의 높은 자살률과 잦은 번아웃 현상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결과다. 이런 사회 안에 갇혀있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열정을 쏟아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것에 모든 정열을 불태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프랭클 박사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던 내용 중 하나인 불행 속의 기회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 차례이다. 그는 수용소 생활 중에서도 끊임없이 고난의 이유와 배울 점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이 고난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라고 이야기한다. 이유 없이 맞고 먹지 못하고 잠을 자지 못하고 동상에 걸리는 것이 기회라니. 하지만 나는 그의 말에 완전히 동의한다. 짐을 짊어본 사람은, 고통을 아는 사람은 이후 어떤 시련이 닥쳐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사소한 일상에 감사할 수 있는 느긋함이 생긴다. 그리고 시련을 통해 새로운 나 자신을 만난다.

그 어떤 어려움이 나에게 찾아와도 이것을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과 또 다른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그 결과에 큰 차이가 있다. 이것을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 어려움이 정말로 기회가 될 것이다.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매 순간순간이 고통 그 자체로 이 순간이 지나가도 그에게 남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저 그 시간을 버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에게 이 순간은 기회인가, 아니면 그저 또 다른 고통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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