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보고 싶은 괴물, 붙잡고 싶은 손.
별점: ☆★★★★
트로피컬 나이트는 한여름 밤의 열기처럼 낯설고도 강렬했다. 이야기는 따뜻한 듯하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무언의 불안과 공허함이 읽는 내내 피부에 스미듯 전해졌다. 이야기에 흠뻑 빠져 나조차 기분이 좋았다가 나빠졌다. 즐거웠다가도 무서웠다. 책 표지를 구하기 위해 인터넷에 책 이름을 검색하니 직설적이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사랑스러운 괴담이라는 평이 있다. 조예은 작가의 통통 튀는 상상력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앞서 독후감을 작성했던 작품 '깃털'과 마찬가지로 단편 소설집이다. 작가의 색을 담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 몇 가지를 서평 해보려 한다.
최고로 좋았던 작품은 맨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는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이다. 소설을 끝내고 어느새 펑펑 울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야기는 마치 오랜 친구에게 들려주는 듯한 익숙한 목소리로 시작하지만, 곧 기묘한 분위기가 펼쳐진다. 푸른 머리칼을 한 살인마라는 제목부터가 독특한데, 이 캐릭터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냉혈한 킬러가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기묘한 애잔함이 깃들어 있다. 그는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존재다.
개인적으로 시간 여행이나 여러 차원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시공을 뛰어넘는 사랑이나 우정 같은. 이 이야기가 딱 그랬다. 주인공인 블루는 푸른 머리칼을 가진 소녀이다. 그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의 이웃 써머는 블루와 어린 시절부터 모든 것을 함께한 절친한 친구이다. 블루는 부모님의 사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다. 그러려면 그 마을의 영주와 결혼을 해야 했다. 써머를 마음속에 품고 하루하루 버텨가는 찰나에 블루는 남편인 영주로부터 잔인한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이야기의 흐름은 여기서 예상 밖으로 전개된다. 블루는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도망은 순조롭지 않았고, 도망친 끝에 끝내 블루의 손은 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복수극에 그치지 않고, 블루의 내면을 천천히 부수어 가는 과정이 너무나도 섬세하게 그려진다.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블루가 아니다. 자신의 생존과 써머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어 가는 과정을 겪으면서, 독자인 나도 마치 함께 변화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 작품이 나를 울린 이유는 단순히 잔인한 운명 때문만은 아니었다. 블루와 써머의 관계 속에는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는 수많은 이별과 변화, 그리고 선택의 순간이 녹아 있었다. 우리는 때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들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블루의 마지막 선택을 읽으며, 나는 그녀가 정말로 괴물이 되었는지, 아니면 단지 삶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했을 뿐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항상 써머가 있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그동안 쌓아왔던 감정이 한순간에 터지는 기분이었다.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는 비극적인 인물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때때로 생존을 위해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괴물로 만들기도 한다. 이 소설은 그런 씁쓸한 현실을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들려준다.
'트로피컬 나이트'의 여러 단편들 중에서도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는 유독 여운이 길게 남았다. 단순한 공포 소설을 넘어, 인간의 본질적인 외로움과 상처를 섬세하게 담아낸 작품이었다.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고, 마지막에는 깊은 울림을 남겼다. 이 책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푸른 머리칼의 잔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음으로 다루고 싶은 작품은 '릴리의 손'이다. 이 역시 나의 가슴을 울렸는데 그 이유는 이 이야기 또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인 듯하다.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나는 마치 작품에서 이야기되는 ‘틈’ 사이에 갇힌 기분이었다.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모를 그 경계에서, 작가는 아주 천연덕스럽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꺼내 들었다. 그것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가 아니라, 어딘가 비틀리고, 엇갈리고, 결국에는 닿지 못하는 종류의 사랑으로.
'릴리의 손'은 단편이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의 밀도는 결코 짧지 않았다. 교통사고 이후 기억을 잃은 연주가 로봇의 손을 집으로 들여오고 그 손을 고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의 실마리가 풀려나간다. 그런데 그 손은 단순한 부품 덩어리가 아니다. 어쩌면 릴리라는 존재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긴, 사랑의 조각 같은 거다.
릴리와 연주는 시공간의 틈을 넘나드는 관계다. 처음엔 그 설정이 어지러웠지만, 읽다 보면 이 어지러움이야말로 이 이야기에 꼭 필요한 무게라는 생각이 들었다. 릴리는 기다리는 존재다. 시간을 건너 누군가를 지켜보고 구원하며, 결국에는 손을 내민다. 그 손이 기계라는 것이 이 이야기의 모든 정서를 오히려 더 뚜렷하게 만든다. 차가운 금속의 온도 아래 진심이 숨 쉬고 있었다.
나는 릴리를 보며, 기다림의 슬픔과 그럼에도 계속 손을 내밀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을 생각했다. 손은 어쩌면 가장 직접적인 감정의 언어다. 그리고 릴리는 그 언어를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녀의 손이 마지막까지 누군가를 향하고 있었단 사실이 나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아렸다.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작가는 이야기로 무엇을 보여주려 했을까. 사랑의 기이한 형태? 구원의 방향? 아니면 그 모든 걸 떠나 누군가를 믿고 기다리는 것 자체에 대한 어떤 회의이자 기도 같은 걸까?
'릴리의 손'은 아름답고 슬펐다. SF라는 장르적 옷을 입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이었다. 그래서 더욱 진실하게 다가왔다. 나도 누군가의 손을, 그 마음을, 언젠가는 다시 꼭 붙잡고 싶어졌다.
마지막으로는 '고기와 석류'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어쩌다 보니 독후감 순서가 목차 맨 뒤에서 앞으로 되어 버렸지만 사실 이 책에 가장 처음 수록되어 있는 '할로우 키즈'를 읽은 후에는 책을 당장 덮고 싶었다. 크게 재미도 없고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작가가 시사하려는 바,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도 와닿지가 않았다. 하지만 '고기와 석류'를 읽은 후, 책을 멈출 수가 없었다. 독특한 분위기와 등장인물 그리고 열려있는 결말까지. 묘하게 낯설고도 깊숙이 파고드는 이야기였다. 차가운 아파트, 늙은 여자, 음식물 쓰레기 더미, 그리고 그 안에서 태어난 듯한 아이. 이질적인 조합인데도, 이상하리만큼 감정이입이 되는 구조였다. 특히 ‘석류’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는 말도 되지 않는 괴물인데, 나는 왜인지 자꾸 그 아이에게 마음이 갔다.
옥주는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과는 관계가 끊어지다시피 살아간다. 텅 빈 집에서, 누구에게도 필요 없는 존재로 버텨내는 일상. 그런 그녀 앞에, 어쩌면 가장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석류’가 오히려 삶의 온기를 불어넣는다. 석류는 인간을 먹어야 사는 존재다. 그 본성만 두고 본다면 무섭고 혐오스러워야 할 대상인데, 옥주에게 석류는 그렇게만 보이지 않는다. 나 또한 그랬다. 석류가 배를 곯고 괴로워할 때, 나도 모르게 걱정이 됐다.
사람은 결국 누군가를 돌보고 싶어 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 본능이 더 맞을지도. 옥주가 석류를 돌보며 살아가는 장면들은, 이상하리만치 따뜻하다. 사랑이었을까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자기 위안이었을까. 이유는 무엇이든 간에 그녀는 다시 살아간다. 기이한 존재와 함께.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내 안의 깊은 외로움과, 나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돌봄에 대한 갈망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내가 누군가를 지켜낼 수 있을지, 그리고 누군가에게 지켜져본 적이 있는지. 소설은 그런 질문들을 남긴 채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내 마음속에 머물렀다. 이는 무섭지 않은 공포, 따뜻하지 않은 위로를 건네는 이상한 이야기다.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석류는 지금도 내 마음 한켠, 식탁 아래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트로피컬 나이트'는 괴이하고 아름답다. 누군가는 공포로, 누군가는 위안으로 읽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밤이었다. 그 밤은 끝났지만, 그 안에서 만난 인물들은 오래도록 내 안에 살아 숨 쉴 것 같다. 조예은 작가의 세계는 매번 나를 낯선 곳으로 데려간다. 그곳은 언제나 조금 무섭고, 조금 외롭고, 아주 많이 따뜻하다. 다음에도 그녀의 밤을 함께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