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비 대신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별점: ★★★★★
몇 주 전, 부산은행에 들러 업무를 보며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객들을 위해 진열된 책들 중 예쁘고 알록달록한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제목도 세탁비 대신 이야기를 들려달라니. 주저하지 않고 책을 꺼내 들었다. 누군가 읽은 흔적 없이 깔끔한 책이었다. 에세이 혹은 저널 형식으로 구성된 책은 글자가 큼직하고 장당 내용이 많지 않아 술술 읽혔다.
무엇보다 내 삶의 터전, 부산에서 벌어진 이야기라는 점에서 마음을 붙들었다. 부산일보에 근무 중인 기자들이 산복도로 마을의 역사와 그 안에 숨겨진 보물 같은 지혜를 발굴하기 위해 그 속으로 들어간다. 세탁소라는 공간은 그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지혜로운 매개체였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 그것도 우리 집 바로 근처인 산복도로에 대해 처음으로 배운다는 감각을 느꼈다. 우리 부모님도 잘 모르는 이야기들, 우리가 매일 밟고 있는 땅 아래 숨겨진 역사와 삶의 결들을 나는 이 책을 통해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다. 전쟁, 산업화, 신발공장,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던 수많은 사람들. 교과서에서는 다뤄지지 않는 사람의 역사를 묵묵히 수집한 그 기자들이 참 대견하고 용감하게 느껴졌다.
책의 일부에는 QR코드가 삽입되어 있어 유튜브 영상을 통해 생생한 기록을 접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활자로만 상상하던 산복도로의 풍경과 기자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며 괜스레 뿌듯해졌다. 부산의 산복도로는 분명히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민들 특히 젊은 세대는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지금은 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마치 책을 읽기 전의 나처럼 말이다. 심지어 그 장소들은 종종 달동네, 판자촌이라며 낮추어 불리기도 한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편리함과 자유는 그 자리를 지켜온 이들의 삶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존재 자체에 존중을 보내야 할 필요가 있다.
요즘 사람들은 새것을 선호한다. 새 건물, 새 옷, 새 책, 새 디자인... 하지만 나는 낡은 것들 속에도 분명히 배울 것이 있다고 믿는다. 오래되었다고, 낡았다고 해서 모두 버릴 대상은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고칠 대상이다. 산복도로의 집들과 골목들은 허물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고치고 보존해야 할 가치 있는 공간이다. 조금만 손보고 수리한다면 얼마든지 또 다른 생명을 품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 속 기자들이 마을을 바라보는 방식은 단순한 취재 그 이상이었다. 버려진 공간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곳에 사는 어르신들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고민한 그들의 시선이 인상 깊었다. 왜 그들이 한국기자상을 받았는지 단번에 납득이 갔다.
나는 나고 자란 곳이 영도이다. 커서는 다른 도시, 다른 나라에서 살기도 했지만 내 뿌리는 평생 영도에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은 흰여울 문화마을 바로 근처이다. 영도에는 참 독특한 집들과 풍경이 많다. 오밀조밀 모여 있는 작은 집들, 건너건너 이름을 아는 이웃들, 그리고 조금만 올라가면 펼쳐지는 해안선까지.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엔 영도가 지금처럼 주목받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어제 흰여울 마을을 걷다 보니 외국인 관광객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고 있었다. 카페를 점령하고 골목골목을 누비며 시끄럽게 웃고 떠든다. 물론 그곳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에겐 좋은 일일 테지만, 원래 그곳에 살던 주민들에게도 마냥 좋은 일일까. 담벼락마다 붙은 “조용히 해주세요”라는 문구들이 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과거 그 자체일까, 아니면 그 과거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지금의 사람들일까. 책 속 기자들이 했던 일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한 시대와 공동체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기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책은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 조용히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고. 그러니 가만히 귀 기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