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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자 시리즈.

by 나린글
수확자 시리즈.jpg

별점: ★★★★★+★


'돌이킬 수 있는'을 완독한 후 SF 소설에 빠진 나는, 친구에게 추천받은 수확자 시리즈를 읽기 시작했다. 총 세 권이라 시작하기에 조금 부담되는 것도 있었지만 워낙 좋은 책을 추천해 주는 친구라 믿고 시작했다.


책 제목을 보고 나는 꽤나 의아했는데, 수확한다는 단어를 저승사자 같은 주인공들(표지의 그림으로 유추)에게 붙인 것이 이해하기 조금 어려웠다. 수확한다는 것은 좋은 의미로 곡식이나 기타 재화를 걷어들일 때 사용하는 의미이지 않은가. 여하튼 그 제목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한 채 나는 1장부터 차례대로 글을 읽어갔다. 책이 3권이나 되기 때문에 일단 내용이 정말 많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오히려 책이 더 길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지금부터 100년도 더 지난 미래를 배경으로 인구 과잉 문제에 빠지게 된 지구는 사람을 뛰어넘는 AI 선더헤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선더헤드의 지혜로 그는 인구 축소에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 선더헤드가 생명을 통제하는 순간 그가 신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생명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직업, 수확자. 이 책은 그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1권을 읽다 보면 다양한 궁금증이 생긴다. 완벽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구성에 허점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3권을 모두 끝내고 나면 그 모든 궁금증이 해결되어 있으리라. 주인공은 크게 수확자 패러데이, 시트라, 로언 그리고 수확자 퀴리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주인공이라 칭할만한 인물들이 늘어나지만 가장 중요한 인물들은 저 넷인 듯하다.


수확자 패러데이가 문하생을 들이려 시트라의 집에 방문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모든 수확 자는 강한 권력자임을 책의 초장부터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들이 하는 부탁, 요구 등을 모두 들어주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목숨이 날아갈 것이라는 두려움과 부담감이 잘 표현되어 있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의 줄거리나 전반적 흐름보다도 작가의 상상력이 경이로운 수준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완벽한 수준의 AI와 그것이 발견된 과정, 도덕성 잣대 변화, 의료 체계의 변화, 그리고 우리의 당연했던 일상들이 그들에게는 절대 당연하지 않다는 것. 어떻게 이런 모든 내용을 머릿속으로 상상해서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내가 인류에게 바라는 가장 큰 소망은 평화나 안락이나 즐거움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할 때마다 우리 모두의 내면도 조금씩 죽기만을 빈다. 공감의 고통만이 우리를 인간으로 유지시킬 터이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잃어버린다면 어떤 신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


죽음도, 신도, 진정한 사랑도, 예술도, 열정도 없는 무한한 인생. 영생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온다. 온갖 시술과 영양제, 약물과 수술. 우리는 그저 자연스럽게 인생의 흐름을 따라갈 수는 없단 말인가? 당연하게도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나는 거기에 삶에 대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영원하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고 함께하는 순간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에 끝이 있기에 지금이 아름다운 것이다. 끝을 알 수 없기에 지금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영생을 누리게 된다면 수확자 패러데이의 걱정처럼 그 누구도 생명에 대한 존중을 지니지 않을 것이다. 잠깐 죽었다 살아나면 되니까. 마치 만화 속 캐릭터처럼.


아무도 미래에 대한 예견을 할 수는 없기에 이 소설 속의 불행이 무조건적으로 일어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작가의 지혜에 찬사를 보낸다. 그는 인간이 가진 습성인 멍청함과 두려움을 아주 잘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죽지 않는 삶, 불로불사는 인류의 오랜 꿈이다. 현대 의학에서 노화 연구에 투입되는 돈은 엄청난 수준이며, {생명 연장의 꿈}이라는 말은 아예 귀에 착 붙는 관용어로 자리를 잡았다. 죽지 않는 교주는 나온 적이 없는데도 영생을 약속하는 종교는 이름을 바꿔 가며 계속 수많은 사람들을 홀리고 있다. 그런데 정말로 그 바람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더 나아질까? 긴 시간만큼 경험을 축적하여 현명해질까? 인간 이상의 다른 존재가 될까? 아니면 그저 더 격렬하게 사랑하고, 미워하고, 어리석은 짓을 하는, 오래 사는 인간이 될까?


아쉬웠던 부분은 많지 않았지만 분명 있었다. 2권과 3권으로 넘어갈수록 조금 과하게 느껴지는 급전개나 완전하게 풀리지 않은 실마리들, 조금 과하게 느껴졌던 떼죽음 등등. 하지만 내용에 몰입하고 소화시키는 데에 불편함이 느껴지는 정도는 아니었기에 자세하게 묘사하지는 않겠다.


그들의 장황한 이야기를 읽으며 나를 그 상황들에 대입하여 상상하게 되는 부분들이 꽤 있었는데 특히나 수확자라는 직업 자체가 그랬다. 내가 만약 수확자가 된다면 과연 어떤 역할을 감당해낼 수 있을까? 나는 수확자라는 역할 자체를 해낼 수 있는 그릇이 되는가? 나는 감성적이라 아마 수확자 패러데이가 나를 수확자로서 강력하게 추천했을 듯하다.


아무래도 수확자라는 직책 자체가 정치가와 비슷한 색을 띠다 보니 포럼 등에서 생기는 갈등이 많았는데 그 갈등을 유연하고 지혜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 수확자가 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패러데이나 시트라처럼 죽임 당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고 포용력을 가질 수 있는 수확자가 된다면 나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것은 끝이 있기에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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