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바라본 세상 | 세 번째 이야기
“유재석이잖아요? 어 유산슬 어딨어?
아? 유산슬이에요? 되게 닮았네요? 이거!”
2019년 연말 연예대상 시상식에서 시상자로 나온 펭수가 관객석에 앉은 유재석에게 한 말이다. 펭수는 항상 유재석이 아닌 유산슬을 찾는다. 아마도 2019년에 새롭게 뜬 핫한 신인이라 그럴 것이다.
https://tv.naver.com/v/11668733
유산슬은 이날 신인상을 받았다. 펭수의 질문이나 유산슬의 신인상 수상에 대해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은 그저 재미있는 해프닝으로 여기면서도 다소 혼란스러워했다. 진행자 전현무가 펭수에게 자꾸 유재석을 가리키며 축하인사를 하라는 것만으로도 그렇다.
하지만 펭수는 혼란스러워하지 않는다. 진짜 10살 아이처럼 펭수에게는 혼란스러울 것 없이 유산슬과 유재석은 다른 존재이다. 본체는 하나일지 몰라도 분명 대중매체에서 보이는 유산슬과 유재석은 다른 캐릭터, 즉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캐릭터 명사
1. 소설이나 연극 따위에 등장하는 인물. 또는 작품 내용 속에서 드러나는 인물의 개성과 이미지. ‘개성’으로 순화.
2. 소설, 만화, 극 따위에 등장하는 독특한 인물이나 동물의 모습을 디자인에 도입한 것. 장난감이나 문구, 아동용 의류 따위에 많이 쓴다.
표준국어대사전
펭수가 인기를 얻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검색어가 있었다. “펭수 본체”, “펭수 정체” 등등 펭수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연기자(?)의 정체를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자이언트 펭 TV’에서 펭수는 분명 펭귄이라고 의학적(?) 근거까지 들어 이야기를 했지만 네티즌 수사대의 검색망은 점차 좁혀졌다. 특정 한 인물로 수사 결과가 좁혀지자, 그에 반대하는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펭수 본캐 안 궁금하다!” “본체를 밝히지 말아라!”
그리고 응답하듯 펭수가 말한다.
“펭수는 펭수다!”
마흔 살이 넘어, 갑자기 딸과 동갑인 캐릭터에 빠졌다. 요샛말로 ‘덕질’ 중이다. 그런데 비단 나뿐 아니라 펭수에 홀딱 넘어간 사람들이 적지 않다. 펭수의 유튜브 채널인 ‘자이언트 펭 TV’의 조회수는 날로 올라가고, 펭수는 EBS연습생이었음에도 모든 방송사에 다 출연했다. 급기야 MBC 연예대상에 당당히 시상자로 참여하지 않았는가. 또한 펭수가 좋아하는 참치뿐 아니라, 인형, 잠옷, 아이스크림, 우유 그리고 은행 카드에까지 펭수의 얼굴이 ‘도배’가 되고 있다. 이런 인기 비결은 뭘까.
대부분의 의견엔 거침없이 말하는 펭수의 언변으로 사람들이 대리만족을 얻는다고 한다. 소위 ‘사이다 발언’을 하니 말이다. EBS 사장의 이름 ‘김. 명. 중.’을 과감히 말하고, 배고프다고 힘들다고 당당히 요구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는다. 그렇다고 버릇없는 것은 아니다. 10 살인만큼 길을 건널 때에도 손을 들고 항상 존댓말을 하며 아이들과 온 힘을 다해 신나게 논다.
하지만 나는 “펭수는 펭수다”라는 말에 매료되었다. 이건 앞서 유산슬과 유재석을 헷갈리지 않았던 펭수의 생각과도 맞닿아있다. 이 말은 펭수는 자신의 정체성이 분명하다는 말이다. “남극이 고향인 10살, 자이언트 펭귄, 한국에서 아이돌이 되기 위해서 헤엄쳐 온 EBS의 연습생”인 펭수는 자신의 정체성이 확고하다. 유산슬 역시 반짝이 옷을 입는 트로트 가수로서의 정체성이 있음에도 그 경계가 불명료해지는 지점이 오면 자신이 유산슬인 지 유재석인 지 혼란이 오는 지점이 발생한다. 하지만 펭수는 명확하다!
이러한 명확한 정체성이 사실 부럽다.
마흔을 ‘불혹(不惑)’이라 한다.
의심이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많은 마흔들은 이 말에 의문을 갖는다. 공자의 시절엔 혹은 공자와 같이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은 불혹의 상태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오늘날의 마흔은 의심을 갖지 않는 확고한 평정의 상태를 갖기 힘들다. 그중에서도 가장 혼란스러운 것 중 하나는 바로 ‘내가 누구인가’ 일 것이다. 다시 말해 펭수처럼 말할 수가 없다.
나이를 들어가면서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한다. 나의 경우도, 집에선 엄마이자 아내이고 친정에선 딸이고 시댁에선 며느리이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고 출판사에서는 작가로 봐준다. 그 외에도 동네 아줌마이기도 하고 친구의 엄마이기도 하고 이모이자 조카이기도 하다. 이렇듯 상대에 따라 사회 공동체에 따라 나의 역할은 다양하다. 그래서 간혹 나는 가면을 쓴다. 학교에서 쓰는 가면엔 무게감을 좀 싣고, 엄마일 때엔 자상함과 엄격함을, 며느리일 때는 약자의 불쌍함을 넣는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가면을 헷갈리지 않기 위해서 나름 심리적 스위치를 만들어뒀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조금 더 해보고 싶다.)
그래서일까. 나의 작은 뇌용량으로는 다양한 가면을 쓸 수 없기에 새로운 사람들이나 새로운 단체에 가입되는 것을 꺼려하는 거 같다. 새로운 가면을 만들고 유지하기가 쉽지 않으니 말이다.
이러한 심리적 가면이 바로 ‘페르소나(persona)’다. 심리학자 칼 융이 말한 것으로 자아와 달리 “페르소나는 일종의 가면으로 집단 사회의 행동 규범 또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보통 감독의 페르소나로 배우를 꼽는 경우가 있다. 감독이 영화에서 자신을 반영하여 만든 캐릭터라는 의미이다. 이렇듯 영화에서 자주 쓰이게 되면서 페르소나는 일상적인 용어가 되었다. 또한 케이팝의 대명사가 된 BTS의 노래 <페르소나> 덕분에 더 일반화되었지만 말이다.
페르소나 [persona]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한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사람의 마음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지며 여기서 그림자와 같은 페르소나는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며 자아의 어두운 면이라고 말했다. 자아가 겉으로 드러난 의식의 영역을 통해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내면세계와 소통하는 주체라면 페르소나는 일종의 가면으로 집단 사회의 행동 규범 또는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페르소나는 종종 영화감독 자신의 분신이자 특정한 상징을 표현하는 배우를 지칭한다.
(김광철 외, 『영화사전』, propaganda, 2004)
영화와 노래를 통해 익숙해진 용어이지만,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하는 우리 역시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 엄마, 아내, 딸, 며느리, 선생님, 작가 등등. 그리고 펭수 역시 그 본체가 누구이든, 펭수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에는 ‘펭수’이다. 그러나 펭수가 다른 것은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쓰고 있을 때 나의 진실한 자아를 숨기고 있는 양심의 가책과 함께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이다. 유산슬이어야 할 때 유재석이 웃으며 흔들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펭수는 헷갈리지 않는다. 펭수는 펭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철저히 페르소나, 즉 가면 속에 자신을 숨기며 살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페르소나는 근본적으로 자아의 반영이다. 완전히 다른 인격체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상황에 따라 특정 부분이 강화되고 어떤 부분은 약화된 형태이다. 그러니 나의 모든 페르소나를 긍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을 굳건히 하게 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다. 펭수처럼 말이다.
“나는 나야!”
사실 말은 쉽다. 누구나 펭수처럼 용감해질 수 없으니, 우리가 열 살 펭귄에 열광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래도 매료된 만큼, 나 스스로에게 다짐을 해야겠다. 나의 페르소나를 긍정하고 더 이상 의심하지 말자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펭수 덕질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