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버.의 시간, 코로나 19
마흔에 바라본 세상 | 네 번째 이야기
“존.버.”
존버는 몇 년 전부터 사용되던 줄임말이다. 검색해보니,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쓰였고 주로 게임이나 주식투자자들이 사용하던 말이라 한다. 그러다 이외수 작가가 이 말을 썼고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허지웅 작가 역시 자신의 인생철학을 ‘존버정신’으로 일갈하면서 더 대중적인 용어가 되었다.
존버의 원 뜻(?)은 비속어로, ‘존나게 버티다’라는 의미이다. 한국어만의 뉘앙스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 두 단어를 발음할 때 어금니를 악물고 낮게 뇌까리며 말해야 한다는 것을 연상할 거다. 이 단어가 비속어에서 유래를 했기에 ‘존경스럽게 버티다’, ‘존중하며 버티다’ 등으로 순화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버텨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느낌을 알 것이다. 이건 그냥 ‘기다리는’ 차원이 아니니 말이다.
하늘을 지고 있는 아틀라스의 모습을 표현한 로마 복제품, 2세기(원본은 기원전 2세기 그리스), 현재 이탈리아 나폴리 국립미술관 소장
마치 그리스 신화 속 아틀라스(Atlas)와 같은 거 같다. 하늘을 지고 있어야 하는 벌을 받아, 그저 이를 악물로 버티고 있어야 하는 아틀라스 말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는 저마다 각 상황에서 자신의 하늘의 지고 있는지 모른다.
3월 17일, 또 한 번의 개학 연기를 교육부에서 발표하였다. 3월 2일 개학을 여러 번 미룬 끝에 4월 6일로 연기한 것이다. 아이들이 겨울 방학과 봄방학에 이어 한 달을 더 집에 있게 되었다. 교육부 장관의 말처럼 “우리 모두 처음 겪는” 이 상황이 학부모들은 당혹스럽다. 안전을 위한 방책이라는 것을 십분 이해하지만 또 하루를, 그리고 몇 주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캄캄하다.
사상 초유의 상황을 겪게 한 코로나19를 통해, 마흔 아줌마는 그저 ‘존.버.정신’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근 한 달을 아이와 함께 집.콕.을 하고 있는데 3주를 더 있으라니, 매일 닥쳐올 24시간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숨만 쉬고 지내자니 아이가 안쓰럽고 그렇다고 뭔가를 함께 하려 하니 그 프로그램을 짜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물론 이 시간을 “그간 열심히 살아왔으니 좀 쉬어라”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스트레스를 덜 받으려 노력해도 좋을 거다. 처음 일주일은 그러려고 실제로 노력했다. 초등학생 아이를 둔 엄마로,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일하는 프리랜서로 그리고 마을활동을 하는 자원봉사자로 지내왔다. 그러다 보니 그간 몇 주일을 쉴 수 있었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아이와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서로 눈을 맞추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 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이상적인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다.
하지만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매일 아침,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밖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뉴스를 검색하면서 알아둬야 하고, 집 안의 상황도 쾌적하게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모든 것이 자유로워질 때를 대비해서 그간 해둔 계획들을 재정비하고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 생각보다 신경 써야 할 것이 많다. 나 역시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그렇다고 그저 넋 놓고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흔 살의 존버 칩거생활은 이렇다.
[존버생활 1 : 세끼를 차려라]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최악은 가족이 아픈 거다. 병원을 가는 거 자체가 걱정거리이고 혹시나 열이 오르면 코로나19를 의심해봐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엘리베이터에서 확진자를 잠깐 만났을 때 걸렸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밖에 나갈 때는 마스크를 꼭 쓰고 집에 오면 소독을 하고 손을 씼어야 한다. 혹시나 방심했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니 영양가가 높진 않아도 골고루 먹여야한다. 그리고 집에만 있다 보니 입맛이 떨어질지 모르니 간식도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하루에 네다섯 번은 아이에게 뭘 먹여야 할지 고민을 하게 된다. 새삼 하루에 한 번 학교에서 먹고 오던 급식이 너무나 감사하다.
[존버생활 2 : 가족 구성원의 생활을 좋은 수준으로 유지해라]
주중 낮엔 거의 집에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집에 계속 있게 되니 청결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진다. 조금만 방심해도 거실에 뭔가가 굴러다닌다. 그다지 청소를 즐기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하루에 몇 번은 닦고 쓸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러한 물리적 환경뿐 아니라, 정신적인 상태도 좋은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혹 한 사람이라도 우울해지거나 언짢아지면 어디 가서 풀 수도 없다. 그래서 아이가 심심하다고 징징대거나 학원 숙제를 하다가 짜증이 날 때를 대비한 유혹거리도 생각해둬야 한다. 한편으로 그저 놀게 만 할 수는 없으니 학원 숙제나 인터넷 강의를 규칙적으로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결국 하루에도 몇 번씩 미묘한 기싸움이 일어난다. 학교도 학원도 갈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아이가 공부를 놓지 않기를 바라는 엄마와 쉽게 얻을 수 없는 자유로운 시간에 ‘제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하고 싶은 아이 간의 기싸움은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재방송하는 드라마 '도깨비'를 보고 있는 펭수의 뒷모습.. 나도 아이도 그냥 이렇게 놀고만 싶다.
[존버생활 3 : 바깥 상황을 예의주시하라]
집안은 그나마 내가 컨트롤할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바깥 상황은 그저 예의 주시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자고 하는데도, 왜들 그렇게 나가시는지 모르겠다. 확진자의 증가세가 줄어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코로나19는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서 전파되고 있다. 혹 우리 동네에도 있을지 모르니, 아니면 우리 가족이 지났던 곳에서도 전파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니 새로운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적어도 가야 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은 구분해야 하니 말이다.
솔직히 이 모든 일들을 정치와 연결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치로 보일 지경이다. 아이를 둔 엄마로서, 그저 아이가 집 앞에 나갈 수 있는지 없는지, 혹 우리 동네에 많이 퍼지는 것은 아닌 지, 그것이 가장 걱정되는 데 말이다.
코로나19 현황판 확인은 매일 아침의 일상이다.[존버생활 4 : 언제든지 상황이 나아지면 나갈 준비를 해라]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아닌 프리랜서이기에 이미 한 달 넘게 일들이 미뤄져 오고 취소되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암묵적인 마지노선이란 것이 있다. 바로 그 선에 다다랐을 때, 사회적 거리를 좀 더 좁혀도 될 때가 되면 지체 없이 일을 바로 시작해야 한다. 미뤄졌기 때문에 기간은 더 짧아지고, 그만큼 본래 계획된 것보다 더 빠르게 더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해야 한다. 그렇기에 틈틈이 밀린 일들을 정리해둬야 한다. 언제든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게끔 말이다.
[존버생활 5 : 하지만 유혹에 빠지면 안 된다]
물론 다 내려놓고 싶을 때도 있다. 그냥 쉰다 생각하고 마음껏 배달음식 시켜먹고 집도 좀 지저분하게 해 놓고, 아이에게도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맘대로 놀라고 하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종종 불러내는 사람들의 부름에 답하면서 막 돌아다니고도 싶다. 거리는 한산하고 어딜 가도 사람이 별로 없으니 어쩌면 놀기에 가장 적기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럴 순 없다.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 생활패턴이 완전히 무너지면, 그 이후의 삶을 재정비할 노력이 더 끔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돌아 다닐 수 없는 건 내 건강도 중요하지만 가족이 있고 이웃이 있기 때문이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본다면 그 무게는 어떻게 견딜 것인가.
그나마 이 상황에서 나를 버티게 해주는 건 그간 못읽은 책을 꺼내 읽는 것이다. 그러던 중 이번 상황과 너무나 맞아떨어진 카뮈의 『페스트』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더 이상의 전염을 막기 위해 주인공인 의사 리유가 정부와 함께 만드는 체계적인 대책, 신부의 선동과 신에 대한 의심, 자원봉사자들로 이루어진 보건대, 도시의 봉쇄 등 요즘과 비견할 만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서 카뮈의 통찰력이 새삼 놀랍다. 하지만 가장 마음에 깊이 꽂힌 것은 페스트가 종식된 후의 일이었다. 어쩌면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코로나19의 종식 시기를 예상할 수 있을 거 같다.
“이렇듯 전염병의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후퇴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민들은 선뜻 기뻐하지 않았다. 지난 몇 달간의 시간이 자유에 대한 욕망을 키우면서도 그들에게 신중함을 가르쳐 주었고, 그럼으로써 전염병이 불원간 끝날 것이라는 기대를 점점 버리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소식이 모두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터놓고 말하지 못하지만 사람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커다란 희망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나머지 모든 것은 부차적인 문제로 여겨졌다. 통계 수치가 내려가고 있다는 이렇듯 엄청난 사실 앞에서 새로 페스트에 걸린 환자들은 별 중요성을 띠지 못했다. 공공연히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건강하던 시절을 조심스럽게 기대하고 있다는 징조들 가운데 하나는, 다름 아니라 그때부터 우리 시민들이 페스트 이후의 삶을 어떻게 다시 준비할 지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기꺼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점이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최윤주 역, 파주: 열린 책들, 2019, p. 343)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페스트(La Peste)』(1947) 초판본
소설 『페스트』 속 주인공들이 그 시간을 버텨내고 종국엔 다시 자신의 생활로 돌아가게 된 것처럼, 우리 역시 언젠가 이 시기를 추억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그리는 것처럼 그저 기쁘거나 홀가분하지 만은 않을 거다. 그간 입은 사회 속 상처를 문득문득 느껴야 할 것이고, 공백으로 발생한 혼란을 진정시키느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래도 그 미래에 올 시기에 덜 힘들어하기 위해서 지금을 버텨야 한다. 리듬이 너무 늘어져서도 안 되고 언제까지 버텨야 할지 모르니 너무 긴장해서도 안 되고 말이다.
그래도 작은 희망을 하나 가져본다. 소설 『페스트』 속 주인공들이 힘든 시간 속에서도 자신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서로를 이해하고 이겨내었듯이, 직접 만나지는 못해도 전화나 문자로 안부를 주고받고,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마스크로 얼굴이 가려져도 눈으로 밝게 인사를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일선에서 그 누구보다 고생하는 사람들의 수고를 알아주고 그들을 응원한다면 이 존버의 시간 역시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당장 다음 끼니에 뭘 먹을지는 걱정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