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들여다본 나 | 첫 번째 이야기
상황 1_‘색’을 보는 원리
빛은 어떤 표면에 닿게 되면 일부는 반사가 되고 일부는 흡수가 된다. 그중 반사되는 빛을 우리는 ‘색’으로 여긴다. 그렇게 그 표면을 우리는 보게 된다.
상황 2_전생 체험 속 경험
어릴 적 녹음된 테이프에서 들리는 음성으로 최면에 걸려보는 게 유행인 시기가 있었다. 그때 나는 L로 시작하는 이름으로 “라우라”, “로라” 이런 식으로 발음하는 서양의 십 대 아이였고 비극적인 사람의 실패로 자살을 했다. 사춘기 때 한 번쯤 상상해보는 아름답고 비극적인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거다. 그런데 그때 겪은 경험이 있다.
최면 음성이 과거의 나를 알아보기 위해서 이름을 떠올려보라는 것과 함께 손으로 자신의 몸을 만져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과거의 나(라우라?)는 몸을 만졌다. 마치 바람처럼 하늘하늘 움직이는 팔이었지만 허리에 손이 닿았고, 팔에 손이 닿았다. 그렇게 해서 작은 소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황 3_딸의 질문
이 경험을 다시 일깨운 것은 딸아이의 선문답 같은 질문 덕분이었다.
“엄마, 세상에서 내가 절대로 볼 수 없는 게 뭔지 알아?”
“글쎄?”
“내가 생각해봤는데, 두 가지가 있어. 그건 바로 지구하고 ‘나’야.
지구에 있는 동안엔 나는 지구를 볼 수가 없어. 그리고 나는 거울을 통해서 밖에 못 보니까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볼 수 없는 건 바로 나야!”
‘도대체 이 아이는 이런 생각을 어찌하게 되었지?’하는 흐뭇한 마음과 함께 옛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다. 현생의 나도 전생의 나도, 나 스스로는 볼 수가 없다. 그저 내가 보는 세상을 통해 그리고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나를 알게 되는 거다. (그리고 이런 개념은 자크 라캉이라는 정신분석학자의 논의를 통해서 이야기가 되긴 하겠지만, 너무 복잡하여 설명이 어려우니 그냥 넘어가련다.)
상황4_시선에 대한 죄책감 vs 반발심
난 내가 어떤 사람인 지 너무 궁금했다. 다들 스스로에 대해 잘 아는 거 같은데, 나는 도통 나를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당연한 것이지만, 그땐 다른 이들의 확고함이 너무 부러웠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 대한 판단도 확고하게 내렸다. 그들은 나의 단면을 보고 ‘활발한 사람’, ‘강한 사람’, ‘소심한 사람’, ‘호구 같은 사람’ 등으로 판단을 내린다. 그리곤 그들의 예상과 다른 행동이나 궤적을 그리면 실망하고 비난한다.
처음엔 그러한 비난을 들으면, 내가 정말 죄를 지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려 무리하게 노력하기도 했다. 아니 최근까지 그랬다. 사실 어릴 적부터 지겹도록 들은 말 중 하나가 ‘사람이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는 거였다. 특히 스스로의 행동이나 생각에는 말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밀어붙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포기를 하면 했지, 일단 시작하면 끝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못해내면 스스로를 탓했다.
하지만 이젠 안다. 노력해서 안 되는 것도 있다! 그리고 극한으로 스스로를 밀어붙이면 나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는 지도 알게 되었다. 사실 더 일찍 알았어야 하는데, 그동안 내 몸이 하는 말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 결국은 몸이 크게 아프고 마음에 병이 들기도 하면서 스스로의 말을 들어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젠 죄책감이 아닌 반발심을 갖고자 한다.
“왜 그렇게 나를 판단하는 건데?”
상황5_호기심 많고 명랑 쾌활한 아이?!
어릴 적 일 년에 한 번 가장 설레고 마음이 두근거리는 때가 있었다. 그건 바로 새 학기가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새로운 선생님은 어떤 분일지, 교실에 어떤 친구들이 있을지 등등 너무 궁금한 게 많았다. 심지어 전학을 많이 다녀서 2년 이상 한 학교를 다닌 적도 없었다. 그래서 새 학교 자체도 너무 궁금했다. 그렇게 항상 새로움은 나에게 신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잦은 이사와 전학의 경험은 어떤 새로운 환경에도 적응을 잘 해낸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하지만 시쳇말로 ‘멍석을 깔아주면’ 얼어붙었다. 주변의 어른들은 이런 내 모습을 다그쳤다. 왜 나가서 자신 있게 하지 못하냐고 하며, 마치 이런 연약하고 멍청한 모습을 고치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 실패자가 될 듯이 혼이 나곤 했다. 그래서 그런 상황이 오면 온몸에 식은땀이 나고 머릿속이 굳어졌고 지금도 그렇다.
그럼에도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 지 알기 전에 나는 “항상 명랑 쾌활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반복적인 학습과 노력 때문인지, 외부의 시선에서 보면 밝고 명랑 쾌활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 오면 얼어붙어서 ‘순발력이 약한 사람’이 되고, 이걸 또 극복해내고자 항상 작은 일에도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되었다.
마흔이 되어 나를 돌아보니, 내 마음속 깊은 곳엔 우울함이 내재되어 있고 소심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도 혼자서 탐구하고 관찰하는 게 좋았던 것이었고, 명랑 쾌활하기보다는 조용히 내 할 일을 찾아서 할 때 행복을 느꼈다. 외부의 시선에 맞추느라 난 스스로를 속이고 애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렇듯 어릴 적부터 노력한 ‘긍정적인 위장’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이를 낳고 알았다.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높았지만, 딸은 호기심도 많고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배가 아픈 아이여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힘듦을 참고 열심히 탐구했다. 그리고 집에서 혼자 있을 때는 걸 그룹 댄스를 열심히 추지만,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엄마 이외의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뻤다.
사실 내 어릴 적 잣대로 보면 우리 아이는 겁 많고 대범하지 못한 아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 눈에는 스스로를 극복하려 하고 만족할 때까지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만약 나 스스로를 들어다 보는 시간을 갖지 않았다면, 나도 어른들이 했던 것처럼 우리 아이를 윽박질렀을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잘 모를 때는 나도 당황해서 아이에게 면박을 준 적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으려 한다. 한 사람의 단면에만 반응하는 외부의 시선이 아이의 전부는 될 수 없으니 말이다.
결국
‘나’를 알려면 세상과 계속 부딪혀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내성적인 지, 사교적인 지, 혹은 적극적인 지, 소극적인 지 그리고 체계적인 지, 직관적인 지 등의 모든 특성은 여러 상황에 부딪혀봐야 안다. 물론 MBTI와 같은 심리검사를 알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이 역시 설문식 검사이기 때문에 다양한 상황에 처해본 사람일수록 더 답을 확고하게 고를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마흔이다. 아직 살아갈 날이 적지 않다. 그렇기에 더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모르고, 그때마다 세상의 벽에 맞닥뜨렸을 때 나오는 나의 반응으로 스스로를 더 돌아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로 또 한 번 전례 없는 상황에 처해졌고, 이 속에서 생각지 못한 여러 감정과 생각이 튀어나오고 있다. 이 반응들을 잘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또 한 번 다독여야겠다. 그리고 내 주변도 돌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