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아줌마의 불안증 투병기 22
미리 걱정하는 것,
매사에 완벽해야 하는 것,
실수를 하거나 흐트러진 모습이면 안된다는 것....
뭔가 잘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걱정은 내 마음에서 연유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아니 어쩌면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다'라는 원효대사 해골물 이야기에서부터 주변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 스스로에겐 항상 예외였던 거 같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면, '이렇게 게으르면 나중에 큰 일 날 거야.'
고칼로리 음식을 먹으면, '살찌면 후회하게 될 거야.'
일을 좀 미루거나 약속에 늦으면, '사람들이 나를 안 좋게 생각할 거야.'
초록 신호가 바뀌자마자 출발하지 않으면, '뒤차가 욕할 거야.'
아이의 밥을 제대로 차리지 않으면, '아이가 큰 병에 걸릴 거야.'
...
항상 이렇듯, 모든 일에 대한 부정적인 결과를 예측해 왔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예측'을 하기도 전에 머릿속에 저 말이 울렸다.
상담을 받기 전엔, 매사에 나를 타박하고 작은 실수에도 "도대체 왜 그러냐?"를 남발하며 구박하던 남편 탓을 했다. 연애할 때는 음식 흘리면 닦아주고 넘어지면 잡아더니, 결혼하니까 변했다고 생각했다. 결혼 후엔 도와주긴커녕, 아이나 가족들 앞에서 칠칠치 못하다고 놀리고 화를 내곤 했으니까.
그리고 상담을 받으면서, 더 이전부터 나는 그런 소리를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의 말버릇이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잘 못 일어나면 '나중에 회사는 어찌 다닐 거냐!', 살이 조금 찌거나 예쁘게 꾸미고 다니지 않으면, '그러면 너 결혼 못한다.' 결혼 후에도 집에서 목 늘어진 티셔츠 입고 있으며, '남편 한데 미움받는다.' 이런 말 중 최고는 집에서 웃지 않고 있으면, '너 그런 표정으로 다니면 사람들이 다 싫어한다.' 그래서 웃었더니 '너 그렇게 자꾸 웃으면 사람들이 다 바보로 안다'라 했다. 아직도 그때의 어이없는 기분은 잊을 수가 없다.
어쨌든, 어찌 살다 보니 내가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고 싶은 사람들은 항상 나의 작은 실수, 혹은 행동이 나쁜 결과의 원인이 될 거라고 단언했다. 그렇게 난 가난하고 미움받으며 아프다가 불행하게 죽는 미래를 가질 것이고, 그 원인은 바로 현재 나의 작은 행동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살았다. 그런데 더 아이러니한 것은 그 말들을 너무 자주 들어서, 화도 나고 속상했지만 그냥 익숙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익숙함이 더 끔찍한 거 같다.
그래, 그러니 난 사랑받기는커녕 좋은 시선을, 아니 누구에게도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기 힘든 존재였다. 뭐, 지금도 사실 그 감정은 내 몸 구석구석에 잠식되어 있긴 하다.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미래에 대한 재단을 당연하듯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인식을 하고 있으니, 스스로를 조금은 보호할 수 있게 된 거 같다. 적어도 스스로 엄마나 남편이 하듯 옥죄던 '--- 하니, 불행해질 거야'라는 말을 하진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습관적으로 그 생각이 들 때가 있긴 하지만)
그렇지만 여전히 엄마와 남편이 하던 그 말을 언제든 다른 사람에게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누구든 나를 그렇게 좋지 않게 보고 평가하고 비판할 거라 생각한다. '할 수도'가 아니라 '반드시 할 거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정신과 약을 먹고 마음을 편하게 지내려 하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것을 먹는 시간이 늘어났다. 예전 같으면 고칼로리 음식을 못 참고 먹으면 죄책감에 괴로워하면서 한동안은 참았을 텐데, 그냥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만큼 먹었다. 좋아하던 빵이나 과자도 원 없이 먹고 음료도 참지 않았다. 약 때문에 마음이 느슨해진 것일 수도 있고, 스트레스를 받기 싫다는 강한 마음이 작용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폭식은 아니지만,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을 때 먹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러운 결과로 살이 많이 쪘다. 최근 일 년 동안은 거의 10 킬로그램이 늘어서, 내 인생의 최고를 경신 중이다. 작년 말엔 이러면 안 될 거 같아서 다이어트를 할 생각을 하다가 그냥 시작도 안 했다.
시쳇말로 다시 결혼을 하거나 연애할 것도 아니고, 외모로 먹고사는 연예인도 아니고, 예쁜 축에 속해서 가꾸면 보람이 있는 편도 아닌데 뭐 어떠냐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살 좀 빼라는 딸아이의 타박에도, "엄마 그냥 예쁜 엄마 안 하고, 푸근한 엄마 하면 안 돼?" 이렇게 말했다.
살이 찌는 걸 신경 안 쓰는 먹고 싶은 걸 참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의외로 탄산음료나 고지방이나 엄청 단 음식을 좋아하진 않아서, 건강을 해치진 않을 정도이긴 하다. 그렇지만 걱정이 된 것은 딸이 창피하게 생각할까 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자기 관리도 못하는' '게으른' '못생긴' 등의 수식으로 안 좋게 볼까 봐 걱정이 되었다. 직접 비판을 듣는 것도 무섭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창피할 거 같았다. 더불어 엄마가 한동안 전화를 자주 하시면서 살 빼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서 더 그렇기도 했다. 그래도 의사 선생님이 '살 좀 찌면 어때요?'라고 지나가듯 해주신 한 마디가 괜스레 힘이 되어서 그냥 맘 편하게 살기로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그런데 의외로 사람들의 반응이 '없었다!'
사실 오랜만에 나간 모임에서 한 어른이 '얼굴 좋아졌네. 살이 좀 오른 거지?'라고 직접적으로 물으셨다. 내가 난감해하면서 웃으니,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내가 아닌 그분에게 그런 얘기를 왜 하냐는 듯한 눈길과 반응을 보였다. 누군가에게 외모로 지적하는 것은 좋지 못한 거라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이후에도 그 누구도 나에게 핀잔을 주지 않았다. 엄마와 남편 빼고는 말이다.
딸도 아빠 따라 '엄마 살 좀 빼'라고 말하긴 했다. 그래도 '푸근한 엄마'가 되고 싶다는 내 소망을 들은 후로는 그냥 내 배를 귀여워해준다. 슬라임 같다나?
그냥 먹고 싶은 것 먹고 그 결과로 살이 찐 단순한 상황이지만, 이 상황 속에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인 평가를 지레 걱정해서 스스로 괴롭히지 않았다. 이러다 건강이 나빠질 정도까지 되진 않도록 해야겠지만, 그래도 이런 경험을 통해 조금은 내 마음 가는 대로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 그리고 조금은 더 자신 있게 살아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이 살아주는 것이 아닌 내가 사는 인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