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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튜디오 포카 Oct 30. 2024

할머니 손님

“저기... 손수건에 글씨도 새겨주나요?” 

한 할머니가 스튜디오 문을 열고 물어보셨다. 어린이 그림 수업을 마치고 학부모님들과 대화하며 아이들의  짐가방을 챙기던 때라 곧바로 응대해드리지 못했는데, 할머니는 스튜디오 안의 상황을 보시곤 안으로 들어오셔서 가방을 살포시 무릎에 얹고 빈 의자에 앉으셨다. 


“아이고 정신없으셨죠, 죄송해요. 어떤 일로 오셨지요?” 손님이 한 차례 나가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여쭤보았다. 할머니는 “손수건에 글씨를 새기고 싶어서요.”라고 차분하게 다시 말씀해 주셨다. 

개인 의뢰는 마감 기한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작업 일정이 늘어지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개인 의뢰는 피하는 편인인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다리시게 한 게 마음이 쓰여서 어떤 일인지 자세히 여쭤보기로 했다. 


“손수건에요? 수량이 어떻게 되시나요?”라는 질문에 할머니는 쑥스러워하시면서 노란 손수건 한 장을 꺼내셨다. 유치원생 손녀딸이 유치원에서 주최한 방송국 음악회에 참여했는데 그때의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서, 할머님에게 그날 목에 걸었던 단체 손수건에 행사명과 이름을 새겨달라고 했다고. 아. 인쇄를 의뢰하시려고 한 거인 줄 알았는데, 한 장을 말씀하시는 거였구나. 얼마 전에 고등학교 동창회 티셔츠를 디자인해 줄 수 있냐며 한 시간가량 상담을 받고 가신 어르신이 생각나 한 장 짜리 수량을 원하실 거란 생각은 못했던 것 같다.   

“음, 그럼 유성펜으로 하셔도 될 텐데요.”하고 말씀드리자 할머니는 “집에 유성펜이 없어. 어떻게 생긴 건지 알려주면 내가 사 올게요.” 하셨다. 아, 도움이 필요하시구나. 이건 돈을 적게 받아도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어떤 손수건인지 보여달라고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가방에서 곱게 접힌 노란 손수건과 음악회 일정표를 꺼내 보여주셨다. 서랍에서 유성매직을 찾아 손수건 끝자락에 살짝 꼭 찍어 보았는데, 섬유가 얇아서인지 잉크가 물처럼 번졌다. 이건 펜을 쓰게 되면, 번짐으로 엉망이 되어 손녀가 울겠다 싶어서, 잠시 자리에서 기다리시라고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면서 아크릴 물감과 붓을 꺼내 손수건 꾸밀 준비를 했다.


'2024학년도 작은 음악회

날짜: 2024년 9월 27일(금)

장소: KBS 아트홀'


할머니가 꺼내주신 음악회 일정표를 보고 검은색 아크릴 물감으로 한 자 한 자 복기하며 적었다. 글씨만으로는 조금 휑한 느낌이 들어서 빈 공간에 어린이의 얼굴도 그려 넣었다. 손녀분이 머리가 긴지, 앞머리가 있는지 없는지도 여쭤보았는데 할머니는 휴대폰을 꺼내 손녀의 사진을 자랑스레 보여주셨다. 붓질을 하는 동안 할머니랑 손녀딸과 가족 이야기, 명절과 제사 이야기(할머님은 나랑 같은 성당에 다니시는 분이었다), 동네에서 사는 이야기 등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손수건 그림이 완성되었다.


할머님은 "아이고 고마워요, 언니 거 해준 거 알면 동생도 해달라고 하는 거 아닌 가 모르겠네."라고 하셨다. 흡족해하시는 게 느껴져서 기뻤다. 

할머님이 “얼마를 내야 할까요?”하셔서, “주실 수 있는 만큼 주세요.”했는데 내가 딱 생각했던 금액을 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내가 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는지, 깨닫게 되는 기분 좋은 소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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