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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튜디오 포카 Oct 31. 2024

달팽이의 하루

공식적으로 일요일부터 화요일은 스튜디오가 쉬는 날이다. 일요일에는 가족과 함께 보내고, 월요일부터 화요일 사이에는 외부 일정을 잡거나 문을 닫아두고 개인 작업을 한다. 또 아이의 하원을 담당하는 요일이기도 하다. (수요일부터 금요일은 태권도 학원에 간 아이를 퇴근한 남편이 데리러 간다.)


그날은 화요일이라서 남편이 데리러 올 때까지 아이와 작업실에 함께 있었다. 견적서를 작성해야 하는 업무가 남아있었고, 서류 작업을 하는 동안 아이는 내 옆 자리에 앉아 점토를 조몰락거리며 놀았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났는지, (엄마가 집중해야 하니까, 잠깐동안 말 걸지 말아 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 혹시 그 노래 알아? 달팽이 노래인데, 내 친구 지환이가 좋아하는 노래야. 어떻게 부르는 거냐면..."

작은 목소리로 흥얼흥얼 부르는 노랫말에 귀 기울여보니 가사가 참 예뻤다. 달팽이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라니.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블루투스 스피커로 함께 듣기로 했다.


보슬보슬 비가 와요, 하늘에서 비가 내려요.

달팽이는 비 오는 날 제일 좋아해.


동요는 좋아하는 날임에도 걸음이 하도 느려서 친구들과 풀잎 미끄럼도 채 타보지 못한 달팽이의 하루를 그린 노랫말이 담겨있었다. 마침 비 오던 화요일이라 그런지 창 밖의 풍경과도 잘 어울렸다. 아이는 자기가 소개한 노래를 엄마가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을 보고 덩달아 신이 나 보였다. 그날 우리는 동요 '달팽이의 하루'의 가사를 모조리 외우고 싶어서 아빠가 올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 함께 들었다. 


나는 올해 봄부터 그림 그리는 수업 '꼬마 작가반'을 열어 어린이들을 틈틈이 만났다. 하지만 미술학원처럼 여러 명을 한꺼번에 만나기에는 솔직히 내 역량이 부족했다. 중학생 이하의 어린이들을 가르쳐보는 건 처음인 데다가, 자칫하면 작업할 에너지가 모두 고갈될까 봐 염려되어 힘을 아껴두고 싶었다. 그래서 꼬마 작가반 수업은 1:1로 운영한다. 작업실 비용을 마련하려면 수강생 확보에 더 애쓰면 좋으리라는 것을 알지만, 개인 작업이 수익이 되는 일이 아니란 것도 알지만, 육아로 작업 시간 확보가 어려워 외주 작업 진행이 더디다는 것도 알지만... 느리더라도 드문드문 어린이를 만나며 그림 그리는 삶을 유지해보고 싶다. 
아이의 성향상 소수정예의 수업이 알맞겠다고 생각하는 보호자 분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는지 종종 소개를 받았다며 아이랑 상담하러 찾아와 주시곤 하는데, H도 그렇게 만난 어린이 었다. H는 초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느린 학습자 어린이로, 반 아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학교 생활을 한다. 하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재능이 있어서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들었다. H는 고양이와 포켓몬스터의 뮤, 이브이를 속성별로 구성해 그리는 실력이 뛰어났다. (나도 H 덕분에 이브이의 진화 과정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조금 더 형태감 있게 그리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어도, 배우는 것보다 원하는 재료로 마음껏 혼자 그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컸는지, 우리의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H는 그 마음을 곧바로 표현하곤 했다. 그림 수업인데 그림을 가르쳐 줄 수 없다니... 가르쳐주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이대로 수강료를 받아도 되는 걸까, 수업을 계속 진행해도 되는 걸까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이날 달팽이의 하루 동요를 듣고 나는 H에 대한 생각을 바꿔보기로 했다. 느린 걸음이더라도 달팽이가 만족한 하루를 보냈다면 괜찮지 않을까. 달팽이가 즐겁게 나아갈 수 있다면 말이다.

이제 H와 나는 한 주는 그리고 싶은 걸 마음껏 그리고, 그다음 주에는 그림을 배우기로 규칙이 아닌 약속을 만들었다. 그리고 싶은 걸 마음껏 그리는 날에는 나도 H의 곁에서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마음껏 그린다. 그리고 서로의 그림이 멋지다며 칭찬도 나눈다. H는 유화 작업을 하는 나를 보고 처음으로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고 했고, 다음 주에는 새로운 재료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온종일 걸은 게 한 뼘 남짓한 거리일지라도 달팽이들은 서로를 북돋우며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짧은 걸음이지만 결코 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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