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로 Mar 22. 2019

여우와 두루미

1984년생 엄마가 2014년생 아들에게

한동안 소원했던 ‘잠자리 독서’가 은근슬쩍 다시 시작되었구나. 잠자리에 누워 독서등을 켜는 고요한 시간. 엄마가 지하철 잡상인한테 만원 주고 사 온 독서 스탠드를 보고 아빠는 “얼마 안 가겠네.”라며 마치 사기당한 걸 미리 애도한다는 듯 말했는데 웬걸, 2년이 지나도 거뜬한 걸 보면 전자제품이라고 아빠 말이 다 맞는 건 아닌가 봐.


지하철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있단다. 쿨 토시, 코털 뽑기 기계, USB 충전식 미니 선풍기, 허리띠, 힙색, 허리 지지대, 채소 다지기 칼, 우비, 먼지제거기 등 품목도 각양각색이야. 모두들 자기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지하철 안, 침묵을 깨는 육성이 들리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드는 사람도 있고, 미간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지. 엄마는 멀뚱멀뚱 구경하는 쪽이란다. 잡상인은 승객들 앞에서 직접 시범을 보이며 현란한 말솜씨를 뽐내. 한순간 지하철은 TV홈쇼핑 오프라인 버전으로 변모해. 지하철의 쇼호스트라고나 할까? 하지만 지하철 내에서 물건을 파는 행위는 불법이란다. 잡상인은 하차해달라는 역내 안내 방송을 하거나, 익명의 승객이 <지하철 불편 신고 문자>로 신고하는 경우도 있어. 불청객인 동시에 지루한 지하철을 깨우는 유랑단에게 엄마는 그날, 만원의 행복을 득한 셈이지. 엄마 책 볼 때 쓰려고 구매한 독서 스탠드를 너에게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방의 불을 끄고 독서 스탠드를 탁, 켜면 너의 얼굴에도 설렘의 미소가 탁, 번진단다.

 엄마가 잠자리 독서를 시작한 건 네가 책과 친해지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었어. 자녀의 독서 습관을 들이는 게 좋다고 하니 숙제처럼 하는 날도 솔직히 있었지. 네가 책을 들고 왔는데 “엄마 너무 피곤해서 그런데 내일 읽어줄게” 한 바람에 너를 울린 날도 있고, 권만 고르라고 한 날도 있으니, 너도 조금은 눈치챘겠지.


 네가 가지고 온 책이 몇 권이든 흔쾌히 읽어주기 시작한 건, 책 읽어주는 엄마 목소리를 듣는 네 표정을 본 후부터야. 엄마가 베개에 비스듬히 기대어 책을 들면 너는 냉큼 엄마 품속으로 기어들어 온몸을 엄마에게 실어. 제법 묵직해진 그 무게가 엄마를 안정되게 만든다. 엄마는 글을 읽으며 네 얼굴을 훔쳐보곤 해. 책 그림자가 드리운 너의 얼굴, 통통한 불 속에 묻힌 까만 눈이 빛나는 게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두고두고 눈에 담고 싶단다. 이제는 이름하야 ‘아들 얼굴 염탐 시간’이 되어버렸어. 그런데 며칠 전 책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던 네가 그러더라. “책이 이렇게 재미있는 건 줄 몰라떠.” 자, 이제 우리 집에서 책 안 읽는 사람은 아빠뿐 인 건가?     


 아빠는 자기도 책 좋아한다며 항변하더라? 7년 동안의 결혼 생활 중 아빠가 책 읽는 모습을 본 걸 꼽으면 손가락 한 두 개만 있으면 될 것 같아. 어느 날은 침대 맡에 못 보던 책이 있어서 뭐지, 싶 봤더니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었어. 아들러 심리학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일본 작가가 쓴 책이야. 아빠가 요즘 읽는 책이라며 추천하더라고.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이겠니? 부부가 책을 추천하며 권하는 모습이라니! 그날 엄마 손가락이 하나 접혔네.  


엄마가 동경하는 가정의 모습이 있어. 휴일 오후 서너 시 정도, 어떤 약속을 잡기에도, 하루를 마무리하기에도 애매한 시각. 온 가족이 책을 읽는 거야. 각자 편한 자리를 잡고서 말이야. 철저히 자기만의 세계이면서도 함께 하는 시간인 거지. 아빠가 진급 시험을 앞둔 그날이 생각 나. 시험공부해야 한다며 아빠는 방으로 들어가서 책을 보고, 엄마는 침대에 누워 책을 읽었지. 너는 색칠 공부를 했나 아마 그랬을 거야.

아빠가 진급한 날 우리 가족은 외식을 했는데, 아빠에게 엄마는 그날 이야기를 꺼내며 의도를 담아 넌지시 압박했어.       

 “그날 너무 좋았어.”

 그랬더니 아빠가 뭐랬는 줄 아니?

 “나는 너무 졸렸어.”    


엄마와 아빠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방식이 달라. 한날은 쳐있는 엄마에게 아빠가 집 앞 배드민턴 코트에 돗자리를 깔고 치킨에 맥주를 먹자더라고. 돗자리에 앉았는데 기분전환은커녕 짜증만 나더라. 피곤해 죽겠는데 집에서 좀 쉬게 해주지 싶어서. 결국 분위기만 서먹한 채로 집으로 들어오고 말았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야 알았지 뭐야? 아빠가 엄마 컨디션을 무시한 게 아니라 아빠의 충전 방식대로 엄마에게 해 준거라는 걸.    

 

 엄마는 혼자만의 시간을 조용히 가지며 에너지를 충전하는 사람이고, 아빠는 야외로 나가 자연을 보아야 에너지가 충전되는 사람이야. 서로의 충전 방식을 몰랐을 때의 서프라이즈가 엉뚱한 배려로 둔갑한 거지. 마치 여우와 두루미처럼 말이야. 이렇게 헛다리 짚어가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게 부부인가 봐. 작년 가을 당진으로 여행 간 날, 밤이 되니까 엄마 컨디션이 급속도로 떨어졌어. 계속 눕고 싶더라고. 그런 엄마를 알아차리곤 아빠가 “여보, 이 사람 노래 정말 감동적이야. 여보는 분명 울 걸?”하며 휴대폰 영상을 보여줬어. 일반인이 나와서 노래 부르는 음악 방송이었지. 뜬금없다는 마음에 심드렁하니 영상을 보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과연 사람을 빨아들이더라고. 아빠는 사연도, 노래 실력도 감동인 영상을 연달아 보여주었고 엄마는 아빠 말마따나 눈물을 쏙 빼버렸지.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상에 푹 빠졌나 봐. 어느덧 임무를 완성했다는 말투로 아빠는 엄마에게 물었어. 

"다시 살아났지?"  


 그러고 보니 어느새 피로는 싹 가시고 심지어 한바탕 울어서 그런지 기분까지 시원한 거 있지. 아빠는 술상을 재정비하며 덧붙였어. “당신은 감정을 건드리면 살아나더라고.”      

엄마는 그날 처음 알았어. 엄마의 리듬이 다시 살아나는 방법을 말이야. 덕분에 엄마는 실치회에 소주를 가뿐히 즐긴 후 2차까지 갔지만 다시는 쓰러지지 않았고, 아빠에 대한 보답으로 이번에는 아빠의 충전 방식을 기꺼이 따랐단다. 그래, 우리 셋이 해변가를 따라 꽤 긴 거리를 걸었던 그날 밤의 이야기야.     


 엄마는 아빠가 책을 읽지 않아도 좋아. 아빠는 엄마가 보지도 못할 수많은 영화를 통해 자신 만의 세계를 구축하니까. 지금은 네가 엄마의 바람대로 책을 좋아하는 아이이지만 책과 멀어지더라도 낙담하지 않으려 노력할 거야. 네가 스스로를 채우는 너만의 방식을 존중하도록 할게. 만약 이 다짐을 잊고 엄마가 엄마의 방식을 네게 강요한다고 느낄 때면 내게 말해주렴.

“엄마, 나의 세계는 엄마의 세계와 달라요.”         

이전 04화 엄마의 남아있는 여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