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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Sep 25. 2019

엄마의 남아있는 여행

1984년생 엄마가 2016년생 아들에게


드디어 어제 새벽 4시를 기점으로 3박 4일 너와 함께 묵을 숙소 예약을 마쳤단다. 우리 둘은 2주 후,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갈 거야. 낮에는 알파카와 젖소에게 먹이를 준다던지, 문어를 잡는다던지 하는 너를 위한 시간을 가질 거고, 밤에는 1만 원짜리 우럭 매운탕에 소주 한 잔 하는 엄마를 위한 시간을 가질 거야. 그러고 보면 우리 둘, 부산, 파주, 김포, 대구, 대전, 강원도 등 잘도 함께 다녔구나. 그곳에는 모두 엄마의 친구들이 있었지. 참 신기한 일이지, 낯선 고장에 아는 사람 하나 있다는 것만으로 그 지역 뉴스가 보이거나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그 지역 이야기가 나오면 귀가 쫑긋해지는 것 말이야. 엄마 친한 친구인 세봉이 이모는 충북 지나갈 때마다 엄마에게 연락을 해. 

“나 충북 지나간다.” 

이렇게 전화하면 10분 만에 달려갈 수 있을 줄 아나 봐. 충북도 꽤 큰데 말이야. 하긴 엄마도 대전에 강의하러 갈 때면 꼭 지희 이모한테 연락하긴 해. “나 그날 대전 간다.” 우리는 마치 제 친구가 그 지역의 문지기인 것처럼 행동하는구나.  


 엄마는 너와 함께 하는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고 있지만, 실은 이탈리아로 갈 뻔했어. 너는 한국에 놔두고 말이야. 세봉이 이모 있잖아, 왜, 김포 사는 이모. 세봉이 이모와 엄마가 자주 술을 마시는 사이라 너도 세봉이 이모 집에서 잔 적 꽤 되잖니. 거기에는 ‘세봉’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가진 강아지가 한 마리 있고 말이야. 


세봉이 이모와 엄마는 많은 대화를 나누는데 둘 다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기 때문이지. 세봉이 이모가 첫 번째 책을 냈던 게 27살인가, 28살 때니 엄마보다 몇 년은 더 빨랐네. 세봉이 이모는 잡지사 본부장으로 승진한 지 얼마 안 된 몇 일 전 사표를 냈어. 소설을 쓰겠대. 글 쓰겠다고 잘 나가던 자리를 박차고 나오다니, 정말 미쳤거나 멋지거나, 그 중간 어디쯤 이거나.


미쳤거나 멋지거나 그 중간 어디쯤인 세봉이 이모가 열흘 동안 이태리 여행을 간다는 거야. “와, 나도 가고 싶다.”라고 말한 게 모든 것의 시작이었지. 세봉이 이모는 엄마더러 그럼 같이 가자고 제안했고, 엄마는 그날부로 심각하게 고민을 했어. 딱히 이태리 여행에 관심 있는 건 아니지만 세봉이 이모가 가니까 따라가고 싶은 그런 거랄까. 유럽의 어느 카페에 마주 보고 앉아 글을 쓰고, 벽돌 길을 따라 좀 걷다가, 저녁에는 어두운 조명 아래 와인 한 잔 하는 그런 그림. 하지만 ‘6 살배기 아들을 둔 엄마’라는 역할을 단 사람에게 열흘이나 떠나는 이태리 여행이 가당키나 하겠니.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고 추석 연휴가 되었단다. 부산 외할머니 집에서 함께 상을 차리고 있다가 엄마는 무심한 척 외할머니에게 물었어. 

“친구가 이태리 여행 가자고 하는데, 혹시 꽃사슴 봐줄 수 있어요? 엄마 출근하는 날에는 베이비시터 구하면 될 것 같은데.” 

외할머니는 음식 차리느라 정신없어서 생각 없이 내뱉은 건지, 정말로 괜찮은 건지 “베이비시터 쓰면 괜찮을 것도 같네.”라고 하셨어. 가장 큰 과제였던 너의 거취가 이리 손쉽게 정해지다니, 외할머니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몇 날 며칠 고민한 게 허무할 정도였어. 그도 그럴것이, 예순이 다 되어가는 외할머니한테 워킹맘 역할을 맡기는 거니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더구나. 귀여운 너로 인해 외할머니는 퇴근 후의 명상도, 독서도, 사우나도 포기해야할 테니까. 


하지만 할머니가 승낙했다고 끝이 아니지. 가장 큰 벽, 너의 아빠! 아빠한테는 또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나, 그렇게 또 시간을 이틀 잡아먹은 거 있지? 얼굴 보고 말은 못 하고 출근한 아빠에게 메시지를 보냈단다.


-여보, 궁금한 게 있는데 그냥 물어보는 거니까 황당해하지 말고 들어 봐?

-응

-엄마가 꽃사슴 봐준다고 하면 이태리 여행 가도 돼?

-휴.. 이미 다 정한 것 같은데.. 다녀와...    


뭐지? 다들 왜 이러는 거지? 아이 딸린 엄마에게 유럽 여행이 이토록 쉬운 일이었나? 아니, 물론, 엄마 친구도 아이가 둘이지만 베이비시터 찬스 써가며 파리고, 미국이고 잘도 다녀오긴 하던데, 이게 지금 엄마한테도 일어난 일 맞냐고?     


그런데 왜 지금 엄마는 이태리가 아닌 너와 함께 하는 제주 여행을 준비하고 있느냐고? 뭐, 이유는 다양해. 베이비시터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갔고, 외할머니가 뒤늦게 베이비시터 쓰는 것에 우려를 표했으며, 너무 늦게 예약한 바람에 비행기 표는 비싸졌고, 이 모든 것이 해결된다 하더라도 너를 외할머니 집에 맡기기 위해 충북에서 부산까지 운전해서 갔다가 김해공항에서 김포공항을 찍고 인천공항으로 가야 하는 경로는 생각만 해도 피곤했지. 무엇보다 엄마 마음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었어. 그게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 무언가가 엄마를 망설이게 하더라.


결국 엄마는 아이를 맡기고 이태리 여행 가는 것에 대한 조언을 여기저기 구했는데, 그중 하나가 지역 커뮤니티였어. 엄마의 고민 글에는 40개가 넘는 글이 달렸고, 대부분의 답은 “떠나세요!”, “다시는 없을 기회예요!” 어느 분은 전화 달라고 연락처까지 남겨 두었길래 무슨 일인가, 전화를 했더니 글쎄, 아이가 없는 50대 부부인데 혹시 아이 때문에 걱정되는 거라면 본인이 아이 등 하원 시키고 밥도 먹이고 남편 늦게 오는 날엔 데리고 자도 된다고, 본인은 유아교육을 전공했다고, 뭐 하러 아이를 부산까지 가서 맡기냐고, 이 동네에서 평소처럼 어린이집 다니며 생활하는 게 아이에게도 베스트 아니냐고 되물으며, 캐리어랑 여권가방 다 빌려줄 테니 떠나라는 말을 하지 뭐야. 캐리어는 있어요, 라고 마음 속으로 대답했어. “사실 저는 여행에 별 흥미가 없거든요.”라는 엄마 말에 그분은 소리쳤어.

“그러니까 더 가야 한다고요!”


얼굴 모를 지역 사람들의 강력한 응원을 받는 기분은 참 묘했단다. 엄마는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어. 영화였다면 트렌치코트를 입은 여인이 여행용 캐리어를 끈 채 다빈치 공항에 내리는 걸로 끝이 났겠지만.    

 

여행도 때가 있나 봐. 세봉이 이모는 갈 때가 되어서 떠나는 거고, 엄마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나 보지. 대신 엄마는 여행보다 더 큰 선물을 받았어. 가능성이라는 선물 말이야. 만약 엄마가 여러 가지 상황에 지레 포기했더라면 결과는 같았겠지만 엄마 우주는 그대로였겠지. 대학교 다닐 때가 생각나는구나. 엄마는 그때 해외 교환학생으로 뽑혔고 본인부담금을 준비해야 했어. 당시 학생이었던 엄마에게 그 경비는 커 보였고 엄마는 외할아버지에게 물어보지도 않은 채 교환 학생을 포기했지. 엄마만의 판단으로 지레 포기한 거야. 성인이 되어 보니 당시의 그 돈은 큰돈이 아니었더구나. 엄마는 네가 ‘지레’ 포기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가능성을 너 혼자 재단하지 말기. 안 돼도 본전이니까? 아니. 안 돼도 본전보다는 건져. 이기는 장사야. 무언가 시도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수적인 것들이 진짜 중요한 게 아닐까. 엄마는 이번 사건을 겪으며 엄마의 우주가 한 뼘 커진 느낌이었어. “왜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내년도 있고, 내후년도 있는데?”라던 아빠의 의문에 기회의 날이 그야말로 몇 만 번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 이 가능성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엄마의 우주는 확장되었지. 엄마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거야! 무엇보다 엄마를 도와줄 이름 모를 이웃을 발견한 것도 든든하고 말이야.   


세봉이 이모가 이태리에서 글을 쓰고 있을 때, 우리는 함덕 해변에 이름을 쓰자. 세봉이 이모가 이태리에서 티본스테이크를 먹고 있을 때, 우리는 올레시장에 들러 문어빵을 먹어보자. 세봉이 이모가 이태리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있을 때, 우리는 겉옷을 걸치고 오름을 오르자. 그렇게 서로 다른 것을 보고 비슷한 것을 안고 돌아오자. 세봉이 이모는 "나 그날 이태리 지나간다"라고, 엄마는 "그날 제주 간다"라고 뜬금포 서신을 던질 문지기 친구 하나 사귀어오면 그것도 좋겠다. 무엇보다 세봉이 이모가 들고 돌아올 소설을 기다려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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