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쪼록 Weather bless you
1984년생 엄마가 2014년생 아들에게
엄마는 운동을 시작했단다. 3년 만의 운동이라 그런지 3일 만에 엄마 다리는 못 쓰게 되었다. 그냥 근육통 정도가 아니라 허리도 못 편 채 어기적 어기적 걷고 있어. 차 타는 것도 힘들어 시트에 엉덩이부터 앉은 다음 팔로 다리를 들어 차에 실어야 하는 정도? 엄마 다리를 고장 나게 한 운동은 ‘스피닝’인데, 자전거처럼 생긴 기구 위에 올라가서 신나게 발을 구르며 푸시업도 하는 격렬한 운동이야. 사람마다 맞는 운동이 있단다. 우아한 백조 같지만 코어가 제대로 받쳐줘야 하는 요가라던지, 어찌 보면 발레처럼 보이는 멋진 포즈와 함께 와르르 넘어지는 쾌감이 일품인 볼링 같은 거 말이야. 아빠는 최근 1년 넘게 점심시간마다 동료들과 탁구를 친다더구나.
운동 종류도 유행을 타나봐. 벨리댄스, 요가, 필라테스, 발레, 스피닝, 스크린 골프를 거쳐 요즘에는 또 집에서 하는 운동이라는 뜻인 홈트레이닝이 열풍이거든. 사람들은 유튜브라는 동영상 공유 플랫폼을 틀어두고 저마다의 시간을 활용한단다. 엄마 친구도 꾸준히 홈트레이닝을 한다고 하더구나. 어젠 너무 피곤해서 10분도 겨우 했다던데, 집에서 운동을 한다는 자체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엄마는 이제 게으름뱅이가 되어서 도무지 스스로는 운동을 하지 않아 센터에 다니는 거거든. 유행이라는 것의 이점은 분명 있지. 엄마도 스피닝 열풍 덕분에 엄마에게 맞는 운동을 만났고 지금까지 그 인연이 이어져오니 말이야.
그런데 사실, 엄마와 제일 잘 맞는 운동은 맨손 운동이란다. 예를 들면 그냥 걷는 것. 엄마의 운동은 1998년도,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되었어. 사춘기인 만큼 다이어트에 관심이 많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15살의 엄마는 신기할 정도로 운동을 꾸준히 했지. 걷기와 줄넘기를 함께 했는데, 비 오는 날에는 우비를 입고 나가기도 하고, 어느 날은 새벽 2시에도 나가서 그렇게 뛰고 걷고 했네. 참 재미있는 건 딸이 그 시간에, 그 날씨에 운동하러 나간다 하면 부모가 말릴법한데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별말 없으셨어. 하긴 엄마가 어렸을 때는 그래도 지금만큼 흉악한 범죄가 횡행하진 않았으니 말이야.
엄마는 참 많이도 걸었어. 엄마가 24살 8월에 증권사에 입사를 했거든. 엄마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신입사원들을 위해서 회사에서 호텔을 잡아주었단다. 여기가 어딘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녁마다 운동복을 입고 나섰지. 길을 모르니까 무작정 직진만 하자, 해서 걸었던 기억이 나. 길 따라 걷는 게 아니라 무조건 직진이니 횡단보도도 건너고 하면서 말이지.
요즘 엄마는 걷기 운동을 못해. 공기가 정말 좋지 않거든. 엄마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을 해서 너를 낳고 기를 때까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단어. 네가 매일 아침마다 오늘은 어떠냐고 물어보는 단어. 우리 가족의 나들이, 여행을 좌지우지하는 그 몹쓸 단어, 맞아. 미세먼지 때문이야. 미세먼지는 엄마의 운동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생활 자체를 바꿔버린 것 같아. 사람들은 미세먼지 알림 어플을 깔고, 공기청정기를 들이고, 마스크를 끼고 다닌단다. 평생 몰랐으면 좋았을 기준인 KF80인지, KF93인지 따지면서 말이야.
지난 주말, 엄마랑 아빠랑 너랑 동네 축구장에 들렀다가 그 뒤로 펼쳐진 거대한 공원을 발견했지? 작은 하천 위 아치형 나무다리를 건너 돌계단을 올라가니 야구장과 족구장도 있었던 거 기억나? 다시 돌계단을 내려오면 하천 따라 우레탄 길이 끝도 없이 펼쳐졌지. 엄마는 새삼 이 동네가 마음에 쏙 들었단다. 엄마는 사실 여기 말고도 또 다른 운동 코스를 안단다. 왜, 엄마가 아빠한테 너무 화가 난 바람에 엄마가 너를 데리고 숙박업소에 가서 잔 날 있잖아. 우리는 편의점에 가서 먹을거리를 이만큼 샀잖아. 엄마는 안주거리 두 개 겨우 골랐는데 나중에 영수증을 보고선 차라리 요리 하나 포장할 걸 그랬다 살짝 후회를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너는 여행 온 것 같다며 크지도 않은 방을 여기저기 둘러보며 신이 났지. 사실 그때 엄마도 설렜어. 작은 호텔에 들어갔을 뿐인데 정말 여행 느낌이 나더라고. 우리 집과 불과 10분 거리임을 잊고선. 너는 침대 위에 앉아서 <꼬마버스 타요>를 보며 과자를 먹고, 엄마는 화장대에 앉아서 부실한 안주와 함께 술을 마셨지. 나름 재미있었어, 그치?
다음 날 너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평소에는 차로 다니던 약 2km의 길을 그날 처음으로 걸어본 거야. 세상에, 어찌나 날은 좋고 길은 잘 되어있던지 걷는 재미가 나더라니까. 중간에 잠깐 쉼터에 앉아서 전날 사놓고서 안 먹은 바나나우유를 마시는데 기둥에 붙은 안내문이 눈길을 끌었어.
<쓰레기 안 치우면 삼대가 망한다>
담당자의 그간 노고가 눈에 보여서 파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단다. 바나나 우유를 먹다가 한 방울 튀었는데 괜스레 찜찜한 마음에 손가락으로 쓱 닦고 말았으니 과연 효과적인 경고문이었네. 이런 게 바로 길 위의 재미야. 무조건 직진하던 여름날의 저녁, 24살의 엄마가 마주친 풍경 -이를테면 망치질하는 모양의 거대한 작품, 긴 돌담길, 정장 입은 한 무리의 직장인들-을 그때는 몰랐지만 서울의 중심지 ‘종로’를 대표하는 표식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안 것처럼 말이야.
엄마는 네가 길 위에서, 바람 속에서, 햇볕 아래서 마음껏 뛰어노는 세상을 만났으면 좋겠는데 어쩐지 그런 날이 자꾸만 사라질 것 같아서 애가 탄다. 아침마다 길을 나서며 “오늘은 구름이 있나?” 하늘을 보는 너의 확인을 어떡하면 좋을까. 하얀 구름이 떠있다는 말은 하늘이 파랗다는 의미이고, 구름이 보여야만 놀이터에서 놀 수 있다고 너는 생각하기 시작했으니까. 잘 가꾸어진 산책로, 축구장, 농구장, 족구장이 어떨 때 보면 폭격 맞아 모두 떠나버린 폐허의 도시처럼 보일 때가 있다. 기회가 된다면 <더 로드>라는 책을 읽어보려무나. 화산재 같은 회색 먼지로 가득 뒤덮인 도시에서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순례자처럼 걸으며 생을 이어나가는 내용인데, 더 이상 엄마 눈에는 이 책이 소설처럼 보이지 않는구나. 더운 나라의 어린이가 하얀색 눈과 드넓은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평생을 사는 것처럼, 너도 서서히 파란 하늘을 잊어가는 비극이 시작된 건 아닌지 심란한 요즘이다.
주말주택으로 마련한 보은의 시골 월세집도 처분을 해야 하나 고민이 많구나. 네가 너무나 좋아하는 시골집인데, 마당의 쓸모에 대해 회의가 드니 말이지. 삽으로 땅을 헤집고 작은 고무 풀장에서 물놀이하며 운좋게 청개구리를 만나기도 했던 그랬던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주고픈데.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미세먼지 때문에 마당에서 놀지 못한 날은 없었는데 무서운 기세로 미세먼지가 우리의 일상을 잠식하는 느낌이다. 더 무서운 건 우리가 서서히 미세먼지에 익숙해지는 모습을 보인다는 거야. 미세먼지 농도를 현재 ‘매우 좋음’, ‘좋음’, ‘보통‘, ’ 나쁨‘, ’매우 나쁨‘으로 구분하고 있거든. 미세먼지 농도가 ’ 좋음‘이어야 비로소 창문을 열고 나들이를 하던 사람들이 이젠 ’ 보통‘만 되어도 날씨가 관여해야 하는 일상을 이행하는구나. 완벽한 '휴일’이 되기 위해서는 이젠 미세먼지 농도가 받쳐줘야해. 휴일과 미세먼지 좋음, 이 두 개가 한날 맞아떨어지면 정말이지 로또 맞은 기분인 거. 엄마만 홀로 스피닝 타며 운동할 게 아니고 너를 위해서, 너의 친구들을 위해서, 너의 세대를 위해서, 엄마, 아빠들이 진짜 ‘운동’을 해야 하는걸까, 잠깐 생각에 잠겨본다. 모쪼록 Weather bless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