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로살다 Dec 12. 2022

마흔 하나, 칼로 물 베기

싸우지 않는다는, 싸워본 적이 없다는 부부에게

나는 늘 조언하곤 한다.


- 빨리 싸워봐야 돼. 그래야 내 배우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어.  모르는 게 약? 아니야.  진짜로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면 부딪쳐보고 싸워봐야되는 것 같아.


그리하여 수차례의 부부싸움 끝에 내가 알게 된 것은,

갈등의 시작은 다양하지만 그 원인은 늘 같다는 것과,

그것을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원인이

 

내가 나인 것과,

당신이 당신인 것


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느 한 해, 혹은 몇 해에 집중적으로 추진된 프로젝트 같은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부터 한 땀 한 땀, 한 층 한 층, 미세하고도 견고하게 쌓여진 지층같은 것이다.


의식적으로 학습하고 느끼고 생각한 것 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흡수한 성장 환경까지 합세하여

나와 당신이라는 존재를 지금까지 만들어왔다.


내가 나인 것이,

그가 그인 것이 잘못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사과할 일도, 사과받을 일도 아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내 인생의 동반자가

나를 위해 이것 하나 바꾸지 않는 것이

못내 서운하고 화가 난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도 하지 않는 것은

그래,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구나.


극단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쌓이고 쌓인 원망과 분노는

간헐적으로 용암처럼 터지곤 하는데,

함께 그리는 삶의 궤적이 넓어지고 길어지는 만큼

부부는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고

- 특히 그 사람의 상처, 고민, 가족간의 불화, 트라우마 -같이 아주 private 한 영역까지도 공유하게 된다.


자신을 점점 오픈하는 것이다.  살을 보인다.


그런 만큼, 다툴 때의 칼은 훨씬 더 날카롭다.

가장 무서운 적은 내부에 있다고 했나.

상대의 약점, 치부를 가장 잘 알기에,

가장 날카로운 칼로 가장 아픈 곳을 공격한다.

그것도 수차례.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어떻게 당신이 나에게 이럴 수 있나.


믿을 수 없는 말과 행동을 경험한 후

분노가 폭발하고 한바탕 전투를 치르곤 기진맥진이 되지만

우리는 꿈에도 상상을 못한다.


것을 앞으로 몇십번 반복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더욱 기막힌 것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하하 호호 웃으며 살게 된다는 것을.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 라는 말을

싱글일 때의 나는 그야말로 동화적으로 해석했다.


- 부부가 되면 애착이 정말 단단해져서

아무리 싸워도 금방 화해하고 잘 지내게 되나보다.

정말 거리가 없는 0촌이라는 말이 딱 맞네.


마흔 하나가 되어 실전을 경험해본 나는

부부의 자아, 자존심, 칼, 전투 따위보다 훨씬 강력한 '물'이

일상 이라는 것,

그 물 줄기를 벨 수 있는 칼은 없다는 것.


부부가 셋팅해놓은 일상은 예외나 오차없이 흘러가야만 한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해야 하고, 두 아이의 등원/하원을 누가 할지 재점검 해야 하고, 송년회가 잡혔다면 며칠인지, 끊임없이 소통하고 중복되지 않도록 일정을 조절해야 한다. 가족들의 생일을 챙겨야 하고, 자취하는 조카가 방문한다는 날에는 어떤 음식을 준비할 지도 상의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소통해야 하고 부딪쳐야 하고,

함께 걸어가야 하는 관계가 부부다.

거대한 물줄기, 일상, 혹은 인생이라는 흐름을 타고

우리 가족은 흘러가고 있다.


옳고 그름, 약속과 불이행, 질책과 변명, 원망과 불신.

이런 지리하고 자잘하고 궁색한 나뭇가지들은

콸콸콸 매일 힘차게 흘러가는

생명력 넘치는 물줄기 앞에서

속절없이 떠내려가고 마는 것이다.



그래도,

의미는 있다.


알고 있다는 것.

당신이 당신인 것

그리고 내가 나인 것을

여러 번에 걸쳐서 확실하게 알게 된 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렇다고 해서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것.


내 맘대로 되지 않는 하루하루이고

왠지 나만 손해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나?

당신의 그/그녀도 똑같다.



부부싸움에 결론은 없고, 그렇다고 끝나지도 않는다.


장검으로 아무리 폭포를 베어봐라.


물결은 비웃듯,

유유히, 힘차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끝없이 흘러갈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흔 하나, 나는 어른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