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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살다 May 05. 2024

마흔 하나, 아직도 참 가벼운 나이

몸무게 이야기는 아니다.


40대 나의 몸무게는 인생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다.

나잇살이 안 빠진다느니, 나이들어 운동 심하게 하면 더 늙는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진실을 덮기 위한 있어보이는 변명들이다.


진실은 무엇인가.


진실은,


고소한 빵과 향긋한 커피 한 잔

얼큰하고 쫄깃한 라면 한 그릇과 신 김치

비오는 날에 먹는 바삭한 김치전 같은

젊었을 때 나의 터부(taboo)들이 주는

가장 본능적이고 확고한 행복을

끝내는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몸매 관리보다는

마음 관리를 선택했달까.


아침부터 온종일 종종거리며 3가지, 4가지의 역할을 해내고 난 진빠지는 날의 저녁은

솔직히, 푸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튼,

나의 몸무게는 가볍지가 않다.


가벼운 것은 나의 정신이다.


Spirit 이라고 해야하나.

아니면 영혼이라고 해야 하나.

한 인간을 구성하는 육체 이외의 것.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라고 말할 때의

그 '어떤' 것.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마흔이 넘으면,

나는 나의 mind 와 spirit과 soul 이

단단히 여물어서

묵직하고 진중해진다고 생각했다.

성숙하고 멋지고 안정된 나이.


그런데, 그런 건

그저 나이만 든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들과 집 근처 공원 상가로 저녁을 먹으러 나간 날이었다.

두 아이는 킥보드를 타고 벌써 저만치 달려나갔고

천천히 따라 걸어가고 있는데

한 눈에 보기에도 준연예인급인 부부가 내 옆을 지나갔다.



긴 생머리의 늘씬한 여자는

작은 얼굴에 완벽하게 화장을 하고

꾸안꾸 스타일의 옷을 타이트하게 입고 있었다.


- 너~ 그러다가 다치면 엄마는 몰라?


몇 발자국 앞서 있는 아들이 태블릿을 보면서 걷자

그러지말라고 몇 번 얘기했는데도 듣지 않는 아이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녀와 아이의 또 몇발자국 앞에,

아이의 아빠로 보이는 훤칠한 남자가 보였다.

키가 190은 되보이고, 심지어 차은우를 닮은

정말 잘생긴 얼굴이었다.

역시 스타일도 아내와 어울리는 스포티한 룩이었다.

아이들의 아빠는 아이의 형으로 보이는

덩치가 큰 아이를 업고 있었고,

두 아이 모두 모델같은 부모의 유전자인지

길쭉 길쭉 했다.


나는 내심 그런 젊고 멋진 부부가 부러웠는지

조금은 심술이 섞인 기분으로 생각했다.


- 요즘 젊은 부부들은 애들 너무 봐주는 거 아닌가?

    핸드폰도 아니고 태블릿을 들고 가면서 보면

    시야가 더 가려서 위험한데...

    더 강하게 말하고 태블릿을 뺏어야지.


- 저렇게 큰 애를 업어주네? 참 나.

    우리 애들도 이젠 안 업어주는데.



잘 생기고 키 큰 아빠가 웃으면서 아내와 둘째 아들을 돌아보는데,


업혀있는 큰 아들의 얼굴이 보였다.



중학생은 되보이는 큰 아들은,

몸이 불편한 아이였다.


얼굴 근육도 잘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손바닥 뒤집듯이 휙, 하고 달라지는

내 속을 느꼈다.



두 멋진 부부에 대한 동경과 설렘,

그리고 뒤따라 오는 시샘과 심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연민과 안쓰러움, 얼마나 힘들까,

그래도 젊은 사람들이 힘차게 잘 사는 모습보니

보기 좋네.



라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렇게

다른 이에 대한 나의 반응이

(주로 외적인 것에 대한) 평가와 지적이다가

그마저도 일순간에 달라져버리는

아주 얄팍하고 가벼운 것이라는 것이

한심하고 참담했다.




왜 나는 다른 이를 평가하는 걸까.

모두 나름대로 자신의 시간을 살고 있는데,

나는 모르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성실하고 소중하게 채워가고 있을 것인데

내가 대체 뭐라고

그들을 지적하고 판단하고

섣불리 조언하려 드는 걸까.



겉으로만 나이 먹은 어르신들이

당신들의 경험과 생각이 진리인 듯 요구할 때

'난 저런 편협한 어른은 되지 말아야지' 했었는데

지금 내가 꼭 그 꼴이었다.


편협한데 그 사고방식마저

휙휙, 바뀌는 어른.


최악이라 생각했다.



내 안에 천겹의 기억과 희로애락이 있듯

모든 이들도 그럴 것이다.



천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만,

내 속도 잘 모르고 사는 내가

다른 사람 속까지 꼭 알아야 할까.



먼저 짚어 속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내 앞의 모습만 받아들이는

그런 단순한 40대가 되고 싶다.



심플한 것이 더 어렵다는데,

그래도 알았으니

그 쪽으로 가기는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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