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집의 집 밥을 보고 받은 첫 번째 충격은
끼니 때마다 밥을 새로 한다는 것이었다.
먹을만치만 해서 한 끼를 먹고 밥솥을 씻고
그 다음 끼에는 다시 새로 한 밥을 먹는다는 것.
최신 기술로 개발된 밥솥에
최고급 쌀로 한 밥이어도
금방 한 밥의 찰기와 향기를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호사를 매일, 그것도 매끼 누리는 애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솔직히, 전 국민의 몇 퍼센트가 이렇게 금방 한 밥을 먹으며 자랐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나의 기억 속 밥은 늘 누런색이었다.
좋은 이천 쌀에 일본제 밥솥이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언제 한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밥 한 무더기가 웅크리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우리 집은 가족이 집에서 함께 밥을 먹지를 않았기 때문에
주방에는 먹을 것이 별로 없었고
혼자 밥을 먹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오래된 밥이라도 발견하면 그렇게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밥이 있다면 그래도 허기를 해결할 수 있었으니.
초등학교 때는 밥을 하는 법을 몰랐고
당시에는 햇반도 없던 때라
일단 밥이 있다면 안심이었다.
< 나의 집밥 1번 > 치즈밥
- 밥을 물에 만다.
- 밥이 오래되 굳었다면 뜨거운 물에 만다.
- 체다 슬라이스 치즈의 비닐을 벗기고 젓가락으로 길쭉하게 금을 그어 잘라놓는다.
- 밥 한 숟갈에 치즈 한줄기를 올려서 먹는다.
꿀 맛.
만약, 금방 한 밥을 먹는 말도 안되는 호사를 누린다면
치즈를 바로 밥 위에 올린다.
뜨거운 밥 열기에 자연스럽게 녹아 내리는 체다 치즈의 자태를 감상하며
거기에 심지어 김치까지 있다면
나의 한 끼는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은 하모니를 이룬다.
친구네 집에 가서 밥을 먹고 받은 두번째 충격.
집 밥에 반찬이 너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6학년 때였나.
친구네 집에 놀러가 밥을 얻어먹게 되었다.
- 갑자기 와서 준비를 못했네~ 그냥 있는 반찬으로 먹자.
고 하시던 친구 어머니는
냉장고에서 락앤락을 6개는 족히 꺼내시는 것이었다.
"그냥 있는 반찬"이 이렇게 많다니
시금치, 감자 조림, 멸치 볶음, 배추김치, 오이김치, 장조림...
식탁이 오색빛깔로 빛나며 눈이 부셨다.
얘는 맨날 이런 밥을 먹는구나.
정말 맛있게 허겁지겁 밥을 먹으며 속으로 다시 한번 놀란 것이
밥도 그렇고
반찬도 금방 한 것 같았다는 것이다.
시금치는 아삭하고, 멸치는 바삭하고,
김치는 사각하고, 장조림은 쫄깃하고.
오래되어 군내가 나거나 눅진한 반찬이 없었다.
설마, 혹시....다른 집은
반찬도 그 때 그 때 하는 걸까?
그에 비하면 나의 집 밥 색깔은 군더더기 없이 심플했다. 흡사 모더니즘의 색채와 닮았다.
- 베이지색 (밥)
- 검정색 (김, 간장)
- 빨강색...가끔 초록도 (김치)
엄마가 식비에 인색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음식을 하고, 챙겨 먹이고, 치우는 그 모든 과정에 관심이 없던 것이다.
가끔씩 마트를 가서 장을 볼 때는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사주었다.
마가린에, 샘표 진간장
최고급 한우 장조림용 고기, 슬라이스 치즈 100개
알타리 김치, 파김치,
국내산 참기름 등등
무겁게 장을 봐서 왔고
냉장고에 수납을 했다.
마가린과 간장, 참기름을 사는 날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든든하고 마음이 설레었다.
바로 마가린 밥을 해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 나의 집밥 2번 > 마가린 밥
- 뜨거운 밥에 마가린을 넣고 비빈다.
- 진간장을 넣는다.
- 참기름을 넣는다.
- 알타리무가 있다면 잘라서 넣는다.
큰 대접에 넣고 비벼 앉아 티비를 보면서 먹는 그 맛!
나의 모든 고독과 고민을 잠재워 주는 고소하고 짭짤한 그 맛이라니.
나의 어린 시절은 마가린과 간장이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꼭 식탁이 무지개빛 반찬으로 가득차야 하는가?
이렇게 단순하고 쉬운 레시피로도 나의 몸과 마음의 허기는 채워지는 것을.
흥!
시간도 많으신가봐,
그렇게 반찬 많이 해서 누가 다 먹어?
다 버리겠지.
부른 배를 두드리며
어린 나는 괜히 입을 삐죽거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의 희망, 바로 계란!
계란이야말로 어떻게 해서 먹어도 맛이 없을 수가 없는
하늘이 주신 귀한 식재료이다.
초등학생이라도 식용유만 두르고 계란을 깨서 맛소금만 살살 뿌리면
훌륭한 계란 후라이를 만들수 있지 않나?
주르르 흐르는 고소한 노른자와
흰 자 끝의 바삭한 식감까지.
그런데... 어렸을 적 할머니와 함께 살 때
저녁 식사 때 할머니가 내오셨던 계란말이는
너무나 맛이 없었다.
왜냐하면, 역시나 너무 오래된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계란말이에 소금, 새우젓, 고춧가루, 다진 마늘까지
너무 많은 양념이 들어가 계란 본연의 맛을 찾아볼 수 없었고
무엇보다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냉장고에 최소 3번은 들어갔다 나왔다 한 것 같은 냉기가
딱딱한 계란말이 안에서 배어나왔다.
할머니도 음식에는 관심도 소질도 없으셨던 것이었다.
할머니도, 엄마도
누구도 기댈 수 없을 때
아이는 자란다.
내가 맛있는 계란 요리를 만들어 먹겠다!
< 나의 집밥 3번 > 계란 이불밥
너무 배가 고픈 날에는
- 계란을 무려 3개나 국그릇에 넣어 착착착 풀고는
- 맛소금을 듬뿍 넣고 다시다도 조금 넣는다.
- 네모난 계란말이용 후라이팬에 한번에 붓고 중불에서 익힌다.
- 뒤집개로 반을 갈라 동생 밥 그릇과 내 밥 그릇위에 한 조각씩 덮는다.
- 꿀 맛.
동생에게,
- 야, 계란밥 먹을래?
하면,
- 오! 그 계란이불밥? 좋아 좋아!
열광적인 피드백이 돌아온다.
- 어 지금 계란할라구
- 오오오오 좋아!!!
계란 이불은 도톰하고 프렌치 토스트처럼 살짝 브라운 색을 띄고 있어 보기에도 먹음직스럽다.
불을 잘 조절하면 안쪽은 아직 익지 않은 부분이 있어
밥과 함께 떠먹으면 촉촉하고 고소하다.
다른 반찬은 필요없다.
계란 이불 밥만 있으면 내 마음도 이불을 덮은 것 처럼 따뜻했다.
어떤 날은 밥이 없었다.
무슨 사정인지 몰라도, 아빠도 엄마도 밥이 다 떨어진 것을 몰랐으리라.
그런 날은 비상이었다.
왜 엄마는 나에게 밥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은 것일까.
멋진 신여성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은 알지만
신여성도 밥은 먹어야 하는데.
밥솥에 밥하는 법만 알려주었더라도
나의 집밥 밥상은 풍성해졌을텐데 말이다.
하긴,
지금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내가
아이들 밥 먹이고 설거지하는 모습을 보면
- 얘, 주방에 있는 모습 보고싶지 않다.
- 그런거 하지마. 나가서 먹자.
하는 엄마이니, 젊었을 때는 더더욱
"여성이여, 집안일에서 해방되자!!!" 주의에 사로잡혀있었을 것이다.
여성이고 남성이고 간에,
집에 밥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애니웨이,
밥이 없는 날은 국수를 했다.
아니,
국수에 도전했다.
국수 육수에 그렇게 많은 재료가 들어가는지
어린 시절의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비슷하게 해보려고 했다.
국수를 너무 좋아했고
너무 먹고싶었기 때문이었다.
< 나의 집밥 4번 고명없는 국수 >
- 국거리 멸치를 5마리쯤 넣고 물을 끓인다.
- 다시다를 세 숟가락 넣는다.
- 다른 냄비에 물을 끓인다.
- 소면을 넣는다.
- 물이 끓어 넘치면 찬 물을 한 컵 붓는다.
- 또 끓어 넘치면 한 컵 더 붓는다.
- 또 끓어 넘치면 한 컵 더 붓는다.
- 멸치를 건져낸 국물에 계란을 풀어 흐트린다.
- 그 국물에 소면을 넣는다.
- 신 김치와 함께 후루룩 먹는다.
너무 배가 고파서 면을 너무 많이 잡았는지
늘 국물에 비해 면이 많았다.
그리고 국물은 내가 먹어봤던 그 맛이 아니었다.
멸치에 다시다에
추가로 무엇이 들어가야 맛있어지는지
그 당시의 나는 당최 알 길이 없었다.
그래도 김치맛으로,
면 식감으로,
특식 별미라 생각하고 배불리 먹었었다.
이 4개의 집 밥이 나의 10년을 채웠다.
배달 음식이나 간단한 요리를 해먹게 되기 전까지
나의 어린 시절 해먹던 집 밥들.
예능 프로나 영화에서
집 밥을 이야기할 때
'엄마의 손 맛' 이라든지,
'보글보글 된장찌개는 기본이죠'
'집에 항상 있는 반찬들 있잖아요, 멸치 볶음, 깻잎김치, 오징어젓, 특별할 것 없는 그런 반찬들이 참 그리워요' 라든지 떠들어 댈 때마다
나는 따돌림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안 그래도 빈 속이
더욱 텅 비워지고
점점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었다.
그래서 대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는 집 밥 이라는 말이
참 아팠다.
특별할 것 없는 그런 반찬들이라니.
된장찌개가 기본이라니.
말 조심해라.
밥 자체가 없는 집도 있다.
아니, 많다.
그 방송을 보면서
도시락김에 오래된 밥을 먹고 있는 아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
집 밥의 종류는
집의 종류만큼 수백 수천개가 있으니
다양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훌륭하게 잘 차려진 한 상 = 집 밥으로
동일시하는 이 무신경한 작태를
언젠가 멈추는 때가 오기를
조용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