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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살다 Sep 17. 2021

내 사주는 고목나무

몇년전인지 기억도 안나지만 동생은 결혼 후, 나는 결혼 전 이었던 걸 보니 14년~15년 사이인 것 같다.

용하다는 사람에게 사주를 보러 갔었다. 

특별한 고민이나 걱정거리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원체 다방면에 호기심과 관심이 많은 동생을 늘 그렇듯 따라갔던 것이었다. 상담료 15만원도 그 당시에는 꽤 싸지도 비싸지도 않은 것이 믿음을 주는 가격으로 느껴졌다.  


분당 미금역의 복잡하게 들어선 주상복합 건물들을 돌아 돌아 힘들게 찾아간 곳은 20평 후반대 오피스텔이었다. 개량 한복을 입은 초로의 남자가 전 상담(?) 지도(?) 를 마친지 얼마 안되었는지 달콤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가스렌지 위 후드로 담배연기를 빨아들이기 위해 식탁의자를 어색하게 두고 앉아 우리를 반겼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온 집안은 이미 찌든 담배 냄새로 가득했다. 


동생의 생일과 태어난 시를 묻고 공책에 한참을 그리고 쓰던 남자는 양반집 담벼락에 핀 해바라기라느니, 벼랑끝에 핀 꽃이라느니, 온갖 현학적인 비유로 우리의 혼을 쏙 빼놨다. 사주를 잘 보기로 명성이 높은 사람은 본인의 실력은 둘째치고, 고객에게 이를 어떻게 효과적이며 드라마틱하게 전달하느냐가 관건인 것처럼 보였다. 들을 때는 있어보이는데, 듣고 나서는 알쏭달쏭, 그래서 어떻다는 건지,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결국 Q&A 세션에서야 우리의 궁금증에 대한 답을 확인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의 사주는 참 이해가 잘 되었다. 

내 사주는 작은 동산 위의 고목나무 라고 했다.


동산 위의 고목나무.

오랜 세월동안 여러 사람이 와서 도끼로 찍고 못살게 시끄럽게 구는데

아무런 미동 없이 그냥 그대로 서있는 나무라고 했다.


내 머릿속에 본 적도 없는꽤 둘레가 두꺼운 나무 한그루가 그려졌다. 

키도 크지 않고, 나뭇가지도 무성하지 않지만 짙은 갈색의 밑둥과 희멀건 마른 나무 껍질을 가진

오래된 나무.

자세히 보면 크고 작은 생채기가 많은데, 태풍이나 벼락을 맞은 것인지, 사람이나 동물이 분풀이를 하고 간 것인지 그닥 중요하지 않다는 듯 표정없이 뿌리를 내리고 서있는 나무 한그루.

나는 내 사주의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다. 

옆에서 누가 시끄럽게 굴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참 다양한 뜻이다. 


줏대가 있다.

고집불통이다. 

앞뒤가 꽉 막혔다. 

성격이 쎄다. 

말이 안 통한다. 

마음이 단단하다.


다 같은 말인데 참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거기에 나는 오늘 한가지를 더 하고 싶다. 

굳건하다. 

굳건하게 버틴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못살게 구는 것, 싸우고 화해하고 웃고 우는 것.

사람끼리의 일은 앞의 표현들이 적당하다.

그것을 벗어나는 차원의 일, 그러니까 아이가 큰 병에 걸렸다는 것 같은.

그런 일에는 굳건함이란 말이 맞는 것 같다. 

아이의 치료와 회복, 동반되는 오랜 병원 생활.

남편과 첫째 아이의 상실감과 우울감.

지치고 지치는 나머지 작은 일 하나하나에 서로를 원망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하루하루.

그 터널을 지난 나의 마음은 다행히 길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터널 속에서 버티는 동안 켜켜이 쌓인 깨달음의 조각들이 나를 새롭게 한다. 


나의 고목나무는 굳건하다.

그 오래된 나무는 

앞으로도 오래도록 굳건히 버틸 것이다. 

그게 내 사주라는 것이 든든하다.


"참 좋은 사주네요. 남자로 태어났으면 큰 일을 했겠어요. 높은 데까지 올라갈 사주인데"


상담 마무리 즈음 도사인지 역술가인지 뭐라 불러야 할지 애매한 남자가 말했다. 

나는 늘 궁금했던 걸 물어보기로 했다. 


"좋은 사주라는게 뭔가요?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돈을 엄청 많이 벌거나 그런건가요?"

"아니 아니 그런게 아니고,"

"그럼요?"

"사주가 좋다는 거는 물 흐르듯이 주변의 것들과 잘 어우러져서 산다는 거예요."

"아..."

"그러니까, 큰 충돌이나 갈등없이 잘 살아간다는 거지. 그게 좋은 사주야"


좋은 사주의 정의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지만 

내 생각보다 훨씬 좋은 뜻이었다. 

모난데 없이 둥글어 주위 환경과 사람들에 잘 섞이며 지내고

또 마음은 굳건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주라니.


나는 정말 좋은 사주를 가지고 태어났다. 


근데...제왕절개로 태어났어도 사주 유효한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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