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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살다 Sep 17. 2021

나는 고민이 없다

우선순위의 재정립

두 아들을 둔 워킹맘으로서 난 고민이 많았다. 응당 많아야 했다.

항상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일도 육아도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이 힘들고 등등...많이 보고 듣고 해온 이야기.

그렇다고 아이들이 없는 신혼일 때는 고민없이 희희낙락했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그때는 살던 아파트 평수가 너무 적어서 어떻게 해야 넓은 평수로 갈 수 있을까? 따위의 것으로 고민했고

첫 아이를 낳고 원하던 새 아파트의 넓은 평수로 이사왔을 때는

남편의 새 부서 적응과 나의 육아휴직 복직과 여러가지 고민거리들이 번호표를 뽑고 줄을 서 있었다.

항상 매 순간 두꺼운 문제집을 푸는 느낌이었고, 너무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는 살짝 뒷편의 해답 섹션을 훔쳐보고도 싶은데 이 놈의 문제집에는 해답 섹션이라는게 없더라.

끝도 없고 해답도 없는 문제집을 푸는 기분으로 사는 것은 참 별로였다.


아이들도 중요하고 커리어도 중요하고, 그래서 좋은 이모님을 구해서 수고비를 많이 드리는데

그러다보니 항상 돈이 쪼들리고, 노후를 위해서 저축 투자도 중요한데 어떡하지?

내 머릿속은 다수의 동일한 비율로 중요한 이슈들로 가득차서

어떻게 하면 그 모든 중요한 것들을 다 잘 해낼 수 있을까가 늘 고민이었다.


그런데 다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은 사실 내가 그 어떤 것도 진심으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남들이, 세상이 놓치면 안된다고 내게 주입한 생각들을 내 생각인 것처럼 이야기했고 심지어 나 스스로도 그게 내 생각이라고 믿었다. 친구나 동기, 선배 후배들을 만나서 그들이 사는 얘기를 들으면, 특히 그 중에 내게 없는 삶의 형태나 구성이 있으면 뭔가 나도 그 퍼즐 조각을 찾아 메꿔내야 할 것 같아서 초조했다.


둘째 아이의 뇌종양 진단과 항암치료 라는 거대한 사건을 겪으면서

너무나 명확하게 우선순위가 정해졌다.


가족의 건강

그리고 기타 등등


더 이상 커리어와 집 평수와 인간관계 같은 것들은

순위를 매길 수도 없을 만큼 우선순위에서 저 아래로 멀어져갔다.

알고 있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너무나 당연한 "건강이 최고야!" 라는 말은

실제로 경험을 통해 나의 마음에 콱 박혔다.

그 결과 나는 예전이라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느라 몇날 며칠을 심각한 감정으로 보내고 있었을 문제들을

너무나 가볍게 내 맘 속에서 밀어내게 되었다.


"죽고 사는 문제야?"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늘, 그런 문제는 아니다.


복직하여 회사에서 또 새로운 일들과 사람들을 만나고 겪고 가끔 화도 나고 스트레스도 받는다.

마음이 복잡하고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긴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이제 내 맘속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생겼다가도 빛의 속도로 자취를 감춘다.

대부분의 시간동안 내 맘 속은 고민 청정지역이다.

한 달 남짓 이런 마음의 상태를 겪으면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걱정거리를 끌어와 움켜쥐고 있었나를 깨달았다.

마음에 걱정이 없으면 불안하고 뭔가를 지금 고민해야 나중에 당황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고민과 걱정이 없으니 지금 오늘에 온전히 집중할 수가 있었고, 그래서 늘 기뻤다.

매순간 남편과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 뿐이고,

퇴근 후에도 전에 없던 에너지가 생겨 기진맥진 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더 지쳤었던 것 같다.


마음이 또 습관처럼 걱정 고민의 늪으로 함몰하려 할 때 마다

은우가 "엄마! 엄마!" 하며 춤추고 점프하는 모습을 본다.

스스로 자랑스럽고 뿌듯해 하는 빙긋. 하는 그 미소를.


다가가 박수를 힘껏 쳐주고 꼬옥 안아 보송보송한 머리털을 쓰다듬으며

아이의 정수리 고소한 냄새를 맡는다.

목덜미에 뽀뽀를 해 까르르 웃게 만들고

그 웃음소리가 너무 황홀해 결국은 옆구리를 간지르며 깔깔 거리며 뒹구는 동안

유투브를 보던 첫째도 어느 새 합류해 셋이 한 덩이가 되어버린다.


지금 이 순간

정말로

나는 고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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