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일도 육아도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이 힘들고 등등...많이 보고 듣고 해온 이야기.
그렇다고 아이들이 없는 신혼일 때는 고민없이 희희낙락했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그때는 살던 아파트 평수가 너무 적어서 어떻게 해야 넓은 평수로 갈 수 있을까? 따위의 것으로 고민했고
첫 아이를 낳고 원하던 새 아파트의 넓은 평수로 이사왔을 때는
남편의 새 부서 적응과 나의 육아휴직 복직과 여러가지 고민거리들이 번호표를 뽑고 줄을 서 있었다.
항상 매 순간 두꺼운 문제집을 푸는 느낌이었고, 너무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는 살짝 뒷편의 해답 섹션을 훔쳐보고도 싶은데 이 놈의 문제집에는 해답 섹션이라는게 없더라.
끝도 없고 해답도 없는 문제집을 푸는 기분으로 사는 것은 참 별로였다.
아이들도 중요하고 커리어도 중요하고, 그래서 좋은 이모님을 구해서 수고비를 많이 드리는데
그러다보니 항상 돈이 쪼들리고, 노후를 위해서 저축 투자도 중요한데 어떡하지?
내 머릿속은 다수의 동일한 비율로 중요한 이슈들로 가득차서
어떻게 하면 그 모든 중요한 것들을 다 잘 해낼 수 있을까가 늘 고민이었다.
그런데 다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은 사실 내가 그 어떤 것도 진심으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남들이, 세상이 놓치면 안된다고 내게 주입한 생각들을 내 생각인 것처럼 이야기했고 심지어 나 스스로도 그게 내 생각이라고 믿었다. 친구나 동기, 선배 후배들을 만나서 그들이 사는 얘기를 들으면, 특히 그 중에 내게 없는 삶의 형태나 구성이 있으면 뭔가 나도 그 퍼즐 조각을 찾아 메꿔내야 할 것 같아서 초조했다.
둘째 아이의 뇌종양 진단과 항암치료 라는 거대한 사건을 겪으면서
너무나 명확하게 우선순위가 정해졌다.
가족의 건강
그리고 기타 등등
더 이상 커리어와 집 평수와 인간관계 같은 것들은
순위를 매길 수도 없을 만큼 우선순위에서 저 아래로 멀어져갔다.
알고 있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너무나 당연한 "건강이 최고야!" 라는 말은
실제로 경험을 통해 나의 마음에 콱 박혔다.
그 결과 나는 예전이라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느라 몇날 며칠을 심각한 감정으로 보내고 있었을 문제들을
너무나 가볍게 내 맘 속에서 밀어내게 되었다.
"죽고 사는 문제야?"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늘, 그런 문제는 아니다.
복직하여 회사에서 또 새로운 일들과 사람들을 만나고 겪고 가끔 화도 나고 스트레스도 받는다.
마음이 복잡하고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긴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이제 내 맘속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생겼다가도 빛의 속도로 자취를 감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