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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살다 Oct 20. 2021

고척동 2층집

나는 서울시 구로구 고척동 164에 54번지에서 태어났다. 전화번호는 612에 8847 이었다. 

집에 있던 까만 전화기로 우리집 전화번호를 돌려보던 기억이 난다. 

숫자마다 구멍이 뚫려있고 손가락을 넣어서 돌리며 전화를 거는 방식의 전화기였다. 

6 촤르르르르, 1 착, 2 촤르륵, 8 촤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8촤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4 촤르르르르르, 7 촤르르르르르르르르

전화를 하고 나면 수화기 속에서는 통화중을 알리는 뜌뜌뜌--- 소리만 났었다. 

우리집 전화로 우리집에 전화를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손가락을 넣어 돌릴 때와 놓을 때의 손맛, 그리고 감칠맛나는 촤르르륵 소리가 나는 좋았다. 

언젠가부터 맥스 전자의 버튼식 무선 전화기가 등장했다. 스프링 모양의 전화줄이 없이 집안 어디서든 전화를 할 수 있다는 건 혁명적인 일이었지만 무선 전화기의 숫자 버튼은 손맛도 없고 왠지 초라해보였다. 


아, 그러고보니 그 까만 전화기는 2층 할머니 댁에 있던 것 같다. 

1층 우리집은 처음부터 무선 전화기 였나보다. 

외할머니는 혼자 2층에서 사셨고 우리 4가족은 1층에서 살았다. 

2층 두 집에서 같은 번호를 쓰던 시절이었다. 전화가 오면 전화왔다며 알리는 것도 일이었다. 


우리집과 할머니집을 헷갈릴 정도로 나는 유년 시절의 상당 부분을 할머니와 보냈다. 

폭 안기면 쿰쿰한 실 냄새가 나고 음식 냄새가 밴 손으로 방금 만든 반찬을 먹여주시는 타입의 할머니는 아니었다. 그 시절에 할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고 훈장을 받고 정년퇴직을 하셨다. 

심지어 내가 초등학교 2학년때 할머니는 나의 담임 선생님이었다.

하교 후 집에 돌아오면 나는 다시 2층으로 등교를 해 부모님이 퇴근하실 때까지 할머니집에서 공부를 했다. 

할머니가 나를 안아준 기억은 없다. 

할머니는 늘 바빴고 뭔가를 쓰고 계시거나 만들고 계셨고, 누군가를 혼내고 계셨다. 

할머니는 나에게 할머니라기보다는 늘 선생님이었고, 어렵고 무서웠다. 


그러나 저녁이 되고, 밤이 되면 가끔 할머니는 재미있는 사람이 될 때가 있었다. 

오후 8시~9시 경이 되면 현관 유리문에 뭔가가 텅, 텅 하며 부딪치는 소리가 나곤 했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나가 보면 할머니가 과자며, 과일이며, 전달 물품- 놓고온 내 공책 따위의 것들을 

비닐 봉지에 넣고 비닐 끈을 묶어 2층 베란다에서 흔들어 우리집 유리문을 두드리셨다. 

핸드폰도 없는 시절이고, 계단을 오르내리기에는 어두운 시간이라 그렇게 물건을 전달하셨다. 

비닐 끈을 풀고 비닐 봉지를 받은 후 2층을 올려다보면 아이처럼 웃는 할머니의 얼굴이 달처럼 떠있었다. 

그 때 할머니는 부모님께 전할 말이라든지, 잠깐 올라와보라든지 하는 얘기를 하셨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퇴근 하시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잠들기 전까지, 혼자 지내는 집이 적적하셨던 것은 아닐까.

엄마도 살가운 딸은 아니었고, 할머니도 손녀들과 도란도란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낯선 일이었다. 

그래도 개와 늑대의 시간이 되면 누구나 조금씩 다른 사람의 온기가 필요해지는 것 같다. 


한여름 저녁

할머니와 2층 테라스 바닥에 얄팍한 비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던 기억도 난다. 

거기 플라스틱 작은 접이식 책상을 펴고 앉아 방학숙제를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그 책상은 너무 작고 네 가장자리가 위로 모아지는 디자인이어서 위로 넘기는 문제집이나 

당시에는 특대 사이즈였던 탐구생활을 펴면 책상이 보이지 않을 정도 였다. 

뭔가를 쓰려고 하면 그 부분만 평평하도록 조절해서 써야했엇다. 

그 여름들은 지금처럼 폭염은 아니었던 것 같은 것이 해질 무렵부터 완전히 깜깜해질때까지

할머니와 나는 모기장 하나 없이 침침한 불빛아래에서 몇시간을 앉아있었고

유일한 방어책은 전등 밑에 놓은 물 채운 대야였다. 

모기를 포함한 날벌레들은 불빛이 일렁이는 대야로 다이빙을 했고 시간이 지날 수록 사상자는 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기에 몇방 물릴수 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여름을 나려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지금 내 다리를 보면 여기 저기 얼룩덜룩한 자국들이 많은데, 모두 여름 모기에게 당한 후 피가 나도록 긁은 후폭풍일 것이다. 

대화도 없는 완벽한 적막 속에 몇시간동안 방학숙제를 줄차게 했던 초등학교 3학년은 1층에서 누군가 나를 구출하러 올라오는 소리는 안나는지 늘 컴컴한 계단을 바라보았었다. 

한참동안 아무 인기척이 없으면  할머니는 뭘 하시는지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그 때 할머니는 일필휘지로 일기를 써내려 가시거나, 집에서 가르치는 아이들을 위한 핸드메이드 문제집을 만드시거나, 며칠전 먹은 수박 껍질 중 초록색 부분을 벗겨내고 하얀 속살로 무침을 만드셨다. 

어린 아이가 견디기에는 참 길고도 힘든 시간이었다고, 맘껏 놀아야할 때에 나는 책상에 앉아 공부만 했다고  내내 생각해왔는데 지금 이렇게 선명하게 그 때를 추억하는 걸 보면 나에게는 그 시간이 추억이고 나름의 놀이였구나, 싶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외할머니.

그 2층 집은 할머니의 성이었다. AKA 고척동 캐슬

할머니는 여황제처럼 군림하시며 엄마와, 이모와, 손녀들을 거느리셨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 할머니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고 고개를 젓게 된다. 

내 인생에 참 큰 임팩트를 남기신 할머니, 여걸, 대장부.

하늘에서도 말잘듣는 부하(?)들을 리크루팅하셔서 황제처럼 살고 계시기를. 

아니 이미 그러고 계실 것 같은 이 느낌은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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